햇볕이 점차 짙어지기 시작하던 5월의 어느 날, 《틈, 빛, 실》 전시를 앞두고 파이브콤마 정혜진 작가를 만났습니다. 그에게 직조는 실을 엮는 작업인 동시에, 단단하게 자신의 삶을 쌓아가는 방식이 되어줍니다. 실과 빛, 틈을 중심에 둔 이번 전시작에 대한 이야기부터 직물과 함께 쌓아온 작가의 시간과 생각을 천천히 따라가 봅니다. Q. 안녕하세요, 작가님. 핸들위드케어에서는 이번 전시로 처음 인사드립니다. 파이브콤마의 소개를 부탁드려요.A. 안녕하세요. 직조를 기반으로 다양한 텍스타일 작업을 하는 파이브콤마 정혜진입니다. 파이브콤마는 다양한 소재의 탐구로 수공예로만 만들어낼 수 있는 독특한 질감의 텍스타일을 선보이며, 한 가지 주제에 매몰되지 않은 다양한 설치미술 작업을 통해 직물의 확장성을 보여줍니다. 또한, 직물이 ‘사용성’을 넘어 하나의 오브제로 존재하고 감상의 대상이 될 수 있기를 기대하며 다양한 작업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Q. 효창공원으로 작업실을 옮기고 핸들위드케어가 첫 인터뷰 촬영이라고 들었어요. 이곳 작업실에서 하루는 어떻게 흘러가나요? 직조처럼 반복적인 작업을 즐기시는 모습을 보면 작가님의 일상도 자연스럽게 루틴화되어 계실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A. 효창공원으로 작업실을 옮긴 지 이제 일 년이 조금 넘었네요. 공원을 마주한 덕분에 매일 조금씩 변하는 계절의 흐름을 온전히 느끼며 지내고 있어요. 보통 작업실에 오기 전에 러닝이나 수영을 한 시간 정도 해요. 작업실에 도착하면 제일 먼저 커피나 차를 내릴 물을 올리고 화분에 물을 줍니다. 워낙 화분이 크고 많아서 시간이 꽤 걸리지만 나름의 재미가 있어요. 커피를 내리고 바깥 풍경을 보면서 책도 읽고 일정 정리도 하고 새소리 들으면서 멍도 때리며 조금 차분하게 오전을 보내는 편이에요. 그날그날 좋아하는 것을 하는 순간을 한 번 정도는 만들려고 하는 것 같아요. 작업 시간이 워낙 오래 걸리다 보니 이런 시간을 애써 따로 만들지 않으면 뭔가 일상에 틈이 없는 느낌이 들더라고요. 그러다 보면 번아웃이 오기도 하고요. 오래 재밌게 작업을 하려면 필요한 시간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정말 바쁘지 않을 때는 꼭 지키려고 하고 있어요. 그리고 그날 일정에 맞춰 작업을 합니다. 직조는 시간을 쌓는 작업이라고 할 수 있을 만큼 시간이 많이 걸리다 보니 특별한 일이 없으면 거의 매일 작업실에 나와서 작업을 하고 있어요. 틈틈이 공원 산책도 하고요. Q. 오월 중순 무렵, 소만은 햇볕이 풍부해지고 작은 만물이 자라며 서서히 채워지는 시기라고 하죠. 이번 전시는 이십사절기 중 ‘소만(小滿)’을 주제로 한 2025 공예 주간 기획 프로그램 〈소만의 일들〉과 함께 진행됩니다. 작가님께서는 평소 이맘때의 계절을 어떻게 즐겨오셨나요? A. 너무 좋아하는 계절이에요. 특히 봄에서 여름으로 넘어가는 시기의 모든 것을 좋아해요. 계절이 바뀔 때 공기의 냄새, 바람의 온도, 바삭바삭하고 눈부시게 반짝이는 햇볕을 정말 좋아해서 많이 걷고 산책하면서 이 짧은 순간을 즐기려고 노력해요. 특히 아침 러닝을 하기에 정말 좋은 계절이라 특별한 일 없을 때는 무조건 아침 러닝을 합니다. Q. 이번 전시의 타이틀은 《틈, 빛, 실》입니다. 작가님 작업은 실을 엮는 것이자 그 사이의 틈을 엮는 것이고, 틈을 지나는 빛과 생각을 엮는 작업이란 생각이 들었어요. 이번 전시를 대표하는 실, 그리고 빛과 틈의 기억이 있다면 어떤 것일까요?A. 틈, 빛, 실. 제가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단어와 순간들이에요. 빛을 가득 담은 직물을 바라보는 것을 좋아해요. 실과 실 사이로 빛이 담기면 빛이 만들어 내는 그림자가 실과 직조되어 새로운 패턴을 만들어 내고, 그 순간에 다른 어딘가에 그림자가 직물을 또 만들어 내고 있어요. 무심코 돌아본 시선에 그 장면이 닿을 땐 잠깐이지만 그 귀여움에 마음이 말랑해지는 기분이 들기도 하고요. 매일의 빛이 다르기 때문에 매일 다른 결의 반짝임을 볼 수 있어요. 아주 잠깐이지만 그 찰나의 순간에 마주하는 행복감이 좋아요. 그걸 보고 싶어서 작업실에 아침 일찍 나가요. 매일 봐도 매일 좋아서! 그리고 이번 전시에서는 한지, 리넨, 실크를 주로 사용해서 작업을 했어요. 한지, 리넨, 실크는 나무 섬유로 만들어진 천연 섬유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지만(실크는 누에고치가 만들어 내는 것이지만, 누에가 먹은 나무 섬유가 주된 재료이기 때문), 실이 되었을 때는 서로 다른 질감을 가지고 있는 부분이 재밌는 것 같아요. Q. 소재에 관한 이야기를 이어가 볼게요. 울, 리넨, 한지, 구리, 펠트, 고무 등 다양한 재료를 자유롭게 활용해 작업하고 계시지요. 때로는 질감, 굵기, 밀도가 서로 다른 소재들이 하나의 직물로 엮여나가는 모습이 인상 깊습니다. 최근 작업 중 특히 흥미로웠던 소재 조합이 있다면 소개해 주시겠어요? 작업마다 소재를 선택하는 기준도 궁금합니다.A. 제가 직조 작업을 대하는 방식, 바라보는 시선에서 비롯된 것 같아요. 직조 작업은 처음부터 정해진 물성이 없잖아요. 내가 어떤 소재를 사용해서 만드냐에 따라 물성이 정해질 수 있다는 점이 저한테는 매력적으로 다가왔고, 이 작업을 하는 이유이기도 해요.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재료들, 직물에 잘 사용되지 않는 재료들을 하나로 엮어서 새로운 물성과 형태의 직물을 만드는 것에 중심을 두고 작업을 이어오고 있어요. 최근에는 울, 금속, 실크를 엮어서 재미있는 텍스처의 직물을 만들어 보고 있습니다. Q. 소재 외에 작업에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요소는 무엇인가요? 텍스처, 레이어처럼 물성적인 요소와 그 외에 놓치지 않으려는 감각이 있을까요?A. 이질감이 있는 소재나 서로 다른 물성의 소재를 한 직물에 담아내다 보니, 그 소재가 만들어내는 텍스처와 조화를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 같아요. 그리고 소재에 갇히지 않으려고 해요. 어떤 때에는 소재에 갇혀서 직조하는 방식에 제약을 두게 되는 경우가 있더라고요. 그 부분을 가장 경계하고 있어요. Q. 파이브콤마의 핵심은 ‘직조’라는 방식으로 새로운 물성의 직물을 만드는 데 있다고 하실 만큼, 직조 작업에 대한 애정이 무척 깊다는 인상을 받았는데요. 직조를 기반으로 한 텍스타일 작업에 매료된 이유가 무엇인가요? 이 작업이 작가님의 삶의 태도나 가치관에 영향을 미친 부분이 있는지도 궁금합니다. A. 아무것도 정해진 것이 없는 상태에서 하나씩 쌓아가는 재미가 있어요. 같은 소재라도 엮는 순서, 방식에 따라 전혀 다른 텍스처를 가진 직물이 되잖아요. 그 과정에서 발견되는 우연한 아름다움을 좋아합니다. 앞서 말했듯이 직조는 정말 시간을 쌓는 작업이에요. 말 그대로 한 땀 한 땀 처음부터 계획하고 하는 작업이든, 즉흥적으로 하는 작업이든, 어떤 소재로 어떻게 작업을 하든 어쨌든 시간을 들여서 쌓아가야 한다는 점은 변함없어요. 때론 지루한 반복이기도 하고 마음처럼 잘 만들어지지 않을 때도 많지만 차곡차곡 쌓아가다 보면 어느새 완성됩니다. 그건 어떤 일을 하든지 마찬가지인 것 같아요. 매일 시간을 들여 화분에 물을 주면, 식물이 그 시간만큼 자라고 꽃을 피우잖아요. 그런 시간을 일상에 잘 쌓아 가려고 노력하는 것 같아요. 매일 아침 운동을 하는 시간을 쌓고, 맛있는 음식을 준비해 먹는 시간을 쌓고, 틈틈이 산책하는 시간을 쌓고, 작업을 하는 시간을 쌓고…. 그렇게 좋아하는 무언가를 하는 시간을 쌓다 보면 꽤 괜찮은 하루가 완성되지 않을까 생각하면서요. Q. 작업을 구성하는 소재와 시간에 대한 태도를 듣고 나니, 작가님이 말하는 ‘아름다움’의 기준도 더 궁금해집니다. 직물의 확장성을 보여주기 위해 과감하게 기능을 배제한 오브제 작업을 하길 택하셨어요. 실용성을 내세우지 않는 작업일수록 아름다움에 대한 기준이 더 예민해질 것 같은데요. 작가님이 생각하는 아름다움이란 무엇인가요?A. 질감을 표현하고 만드는 작업을 하다 보니 그 다양한 질감이 한 작품에, 혹은 한 공간에 존재할 때의 조화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 같아요. 그런 부분에서 조화로움, 자연스러움이 제가 생각하는 아름다움이지 않을까 합니다. Q. 앤더슨 벨, 젠틀몬스터 등 패션 브랜드와 함께한 대형 설치 작업으로 대중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기셨죠. 브랜드와 협업한 직물 작업의 경우 그 스케일이 공간을 압도할 만큼 어마어마하더라고요. 그만큼 물리적으로도 많은 공이 드는 작업일 텐데요. 한 땀 한 땀 손으로 엮어내는 과정이 힘들지는 않으신가요?A. 재미있게 작업했어요. 물론 스케일이 커서 시간과 공이 정말 많이 들어가지만 힘들지는 않았던 것 같아요. 개인적으로 협업을 좋아하는 편이에요. 혼자 작업을 하다 보면 틀에 갇힐 때도 있고 하던 작업만 하게 될 때도 있는데 협업은 그 틀에서 벗어난 작업을 하게 되는 경우가 많아서 작업의 고됨보다는 새로운 작업을 하는 것에 대한 즐거움이 더 크다고 느껴요. 작업을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되기도 하고, 여러 가지 방향으로 확장해 나가는 느낌이에요. 그래서 즐겁고 감사한 마음이 더 큰 것 같아요. Q. 최근엔 영국 빅토리아 앨버트 박물관에 〈Black Grove〉 작품이 소장되었다고요. 파이브콤마의 작업이 한국을 넘어 더 많은 곳에 닿아 사랑받는 모습을 지켜보는 일은 작가님께도 분명 남다른 의미로 다가왔을 것 같습니다. 앞으로 새롭게 도전해 보고 싶은 작업이나 계획 중인 일이 있다면 들려주세요.A. 요즘 새롭게 하고 있는 작업은 한지를 다양한 형태의 직물로 만드는 작업이에요. 종이의 형태로 사용되는 한지가 직물이 되었을 때 일상에 더 가깝게 스며들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호기심으로 이 작업을 시작했어요. 한지로 직조를 해보니 직물이지만 한지 종이 특유의 매트하고 거친 질감이 직물에도 그대로 묻어나서 다른 소재에서는 나올 수 없는 독특한 질감이 나오더라고요. 한지에 다른 물성의 소재들과 함께 직조해 종이가 아닌 형태로 만들어 보고 있는데 앞으로 더 과감하게 확장해 나가 볼 생각이에요. 한지 작업은 이번 전시에서도 보실 수 있습니다. 한지의 새로운 모습들을 흥미롭게 봐주세요. 그리고 7월 말 정도에 새로운 작업으로 개인전을 계획하고 있어요. 작년부터 준비하던 작업을 보여드리는 자리라 걱정도 되지만 설레는 마음으로 즐겁게 준비하고 있으니 많은 관심 부탁드려요. Q. 마지막으로 전시를 찾는 관람객분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 부탁드립니다.A. 그저 편안하게 봐주셨으면 좋겠어요. 제가 좋아하는 포인트들에 함께 공감해 주시면 기쁠 것 같아요. 직물 사이로 반짝이는 빛, 실과 실의 틈 사이로 들어오는 빛이 만들어 내는 질감들, 어느 순간 나타났다 사라지는 그림자로 만든 직물의 결. 그 반짝임을 마주하는 그 순간이 일상의 작은 쉼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조금이나마 전달되기를 바라요. 파이브콤마 작품전 《틈, 빛, 실》은 2025년 5월 16일부터 5월 25일까지, 녹사평 티더블유엘 4층 handle with care 에서 진행됩니다. Editor 오송현Photo 이승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