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전환점이 되어준 베를린을 시작으로 서울을 떠나 강릉에 이르기까지. 전시를 준비하던 초여름의 어느 날, 김나훔 작가가 차곡차곡 쌓아온 이야기와 내밀한 감정들을 차근히 들여다보았습니다. 자신의 지나온 시간을 담담히 되짚고, 일상을 그저 흘려보내지 않으려 애쓰며, 그 안에서 단단한 의미를 건져 올리는 사람. 후덥지근하던 6월의 공기마저 잠시 맑게 식혀주는 듯했던 김나훔 작가와의 진솔한 이야기를 여기 나누어 봅니다. Q. 안녕하세요, 작가님. 핸들위드케어 전시를 통해 처음 인사드립니다. 먼저 작가님 소개를 부탁드려요. ‘나훔’이라는 이름이 히브리어로 ‘위로’를 뜻한다고 들었는데, 이에 담긴 의미도 함께 나눠주시면 좋겠습니다.A. 안녕하세요. 2019년부터 강릉으로 이주해 아내와 아들 그리고 강아지 한 마리와 살고 있는 김나훔입니다. 그림, 사진, 영상 등 다양한 미디어를 활용한 작품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아내와 함께 갤러리 숍 오어즈도 운영하고 있어요. 워낙 이름이 특이해서 작가명으로 알고 있으신 분들이 많은데요. 성경 공부를 하셨던 어머니가 지어주신 이름이에요. 정확히는 ‘위로자’, ‘위안이 되는 사람’이라는 뜻이에요. 어릴 적엔 부르기도 어렵고 쓰기도 어려운 제 이름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는데, 나중에 그 의미를 알고부터는 무척 자랑스럽게 여기는 이름입니다. Q. 인스타그램 프로필에 적힌 ‘저지르는 사람이 주인이다.’라는 문장을 읽고는, 삶의 여러 갈래를 거침없이 지나온 작가님의 여정이 단번에 그려졌습니다. 제빵으로 시작해 직장 생활을 거쳐 무작정 베를린으로 떠난 1년, 그리고 강릉에 정착해 그림을 그리기까지. 요즘은 삶의 주인으로서 어떤 일을 저지르며 살아가고 계신가요?A. 사실 처음부터 그런 성향이었던 건 아니에요. 마냥 철없고 멋대로 살아도 좋았을 어린 시절엔 되려 주변 눈치도 많이 보고 스스로의 잠재력에 대해 무척 축소해서 바라보았던 것 같아요. 인생 다 산 애늙은이처럼요. 뒤늦게 창작을 업으로 삼기 시작하면서 반대로 잃어버린 나의 청춘을 획득한다는 기분으로 살아왔는데요. 그런 성장의 특성 때문에 말씀하신 좌우명을 뒤늦게 기치로 내걸고 살아온 게 아닌가 싶어요. 최근엔 갓 태어난 아들을 통해 세상을 새롭게 보는 법을 배우고 있습니다. ‘얼마나 성숙하고 준비되어야 아버지가 될 수 있을까?’ 고민하던 시기가 있었는데, 막상 아이가 태어나고 보니 오히려 아이를 통해 성장하고 있는 저를 발견하고 있어요. ‘역시 저지르고 봐야 한다는 공식이 이번에도 틀리지 않았구나’ 생각하고 있는 요즘입니다. Q. 이번 전시의 타이틀인 《동쪽에서》처럼 지금 작가님은 강릉에 거주하고 계시지요. 무릇 강릉이라고 하면 여유로운 바다와 한적한 풍경을 떠올리게 되지만, 이 또한 서울 이방인의 시선이 아닌가 싶어요. 정착민으로서 마주한 강릉은 어떤 곳인가요?A. 말씀하신 대로 여유로운 바다, 한적한 자연 속 풍경은 저희를 행복하게 합니다. 그런 자연의 선물이 따분하게 느껴질까 싶지만, 날씨와 계절에 따라 다양한 모습을 보여주는 자연의 힘에 여전히 감탄하며 즐겁게 지내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여행지로서의 특성이 있다 보니 사람들이 가득 찼을 때의 활기도 좋고 일순간 사람이 쑥 빠져나갔을 때의 한적함도 좋아요. 최근엔 저희처럼 강릉이 좋아 이주한 친구들과 관계를 맺기 시작하면서 함께하는 즐거움, 크고 작은 고민 같은 것들도 나누며 지내는데요. 새로운 환경에 도전을 한 사람들이라 그런지 어떤 공통된 에너지 같은 것이 있어요. 역시 사람은 사람에게서 힘을 얻는구나 싶어요. Q. 《동쪽에서》는 강릉으로 이주한 뒤의 경험에서 비롯된 일상의 단편을 담은 전시입니다. 이번 전시에서 담고 싶었던 마음과 장면에 대해 더 자세히 들려주세요.A. 사실 강릉으로 이사를 가던 시기만 해도 내면엔 ‘자연에서 영감을 받으며 그림만 그리며 살아야겠다’라는 단순한 생각만 가득 있었어요. 또 서울에서 스트레스를 받으며 살던 과거의 저를 부정하며 어쩌면 서울과 단절을 떠올리며 떠났던 것도 있었고요. 그런데 이 두 가지 예상이 모두 빗나갔어요. 이제는 그림뿐만 아니라 사진, 영상, 글 등… 제가 강릉에서 지내며 느꼈던 감정들을 다양한 방식으로 풀어내고 싶다는 욕구를 느끼게 됐어요. 아마 아내와 함께 시작한 공간인 오어즈를 운영하며 힌트를 얻은 게 아닐까 해요. 어떤 분야에 매몰되기보단 삶 자체를 담아내자는 생각을 하게 됐죠. 또 하나는 서울을 이제는 정말 다정한 시선으로 보게 되었다는 점이에요. 사물을 너무 가까이서 들여다보면 본질을 분간하기가 어려운 것처럼 그곳에 들어가 반복된 일상을 보냈을 땐 보지 못했던 어떤 전경이 눈에 들어오는 것을 느꼈어요. 가끔 기차를 타고 서울에 가면 비로소 그 도시가 갖고 있는 활력과 더불어 쓸쓸함 같은 것들까지 다채롭게 느껴져요. 그 기분이 정말 좋아요. 이번 전시는 동쪽에서 경험한 저의 일상과 동시에 동쪽에서 바라본 세상의 풍경을 함께 이야기하고자 해요. 강릉에서는 대체 어떻게 먹고 살지? 서울을 떠나 강릉에 살면 어떤 기분이지? 너무 따분하지 않나? 모두 제가 실제로 들었던 질문들인데요. 다양성이 행복한 미래의 열쇠라고 생각하는 입장에서 그 다양성의 한 결로 저희를 이야기해 보고 싶다는 바람입니다. Q. 여행자의 시선으로 현재를 바라보는 것은 작가님의 중요한 영감이기도 하지요. ‘익숙한 일상을 새롭고 낯설게 느끼길 원한다’라는 말씀도 인상 깊었는데요. 하지만 일상이란 본래 익숙함에서 오는 편안함이 매력이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작가님께 새로운 일상이 주는 가치는 무엇인가요?A. 공감해요. 익숙함에서 오는 편안함도 제 삶에 있어 굉장히 중요한 가치입니다. 일례로 저는 긴 여행을 마치고 다시 집에 돌아왔을 때의 안락함이 여행이 주는 행복감 중 매우 큰 부분을 차지하는 사람이에요. ‘나를 품어주고 온전한 안도감을 주는 곳이 바로 여기구나’ 하며 새롭게 살아갈 힘을 얻어요. 과장을 조금 보태 ‘어쩌면 난 그 감정을 느끼고 싶어 어떻게 해서든 바깥으로 떠나려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예요. 그렇다고 매일 낯선 곳을 향해 내뺄 수는 없으니, 일상 안에서 새로운 즐거움을 찾고 또 낯설게 느끼려고 노력합니다. 다시 언급하게 되지만 최근에 찾아온 아이가 요즘 저에겐 매우 큰 변화이자 낯선 여행의 시작이기도 해요. Q. 대부분 작품은 아이패드로 작업하신다고 들었어요. 그림 작업부터 사진 위에 그림을 얹는 혼합 작업까지, 디지털 드로잉을 선택하고 지금까지 이어오게 된 이야기가 궁금합니다.A. 아시다시피 저는 미술을 전공하지 않았어요. 막연히 흥미를 느꼈던 제과제빵 분야로 진로를 결정했고 방황을 좀 했죠. 일머리도 없었고 우선 재미가 없었어요. 그러다 20대 중반쯤 취미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고 꽤 재미나 보람도 느껴져 그 길로 진로를 변경했어요. 어릴 적 배웠던 컴퓨터그래픽 관련 자격증이 도움이 되어서 그 방식을 활용해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어요. 사진은 그보다 훨씬 전인 고등학생 때부터 취미로 해왔던 일이에요. 결국 전부터 재미를 갖고 해왔던 그 두 가지 일이 지금의 제 업이 되었네요. 원래는 그림은 그림. 사진은 사진일 뿐이라고 생각했는데, 그 두 가지를 굳이 분리해야 하나 의문이 들었고 그 경계를 한번 허물어보자는 생각을 하게 되었어요. 김나훔, 「아이스크림 아파트」, 사진 위 드로잉 Q. 특히 사진과 그림을 혼합한 작업은 현실과 상상이 부드럽게 얽힌 듯한 인상을 주어 더욱 동화적으로 느껴지기도 합니다. 이 방식은 어떻게 시작하게 되셨나요? 작업할 때는 전체적인 이미지를 먼저 구상하시는지, 아니면 사진을 찍은 뒤 그 위에 그림을 더해가시는지 작업 과정도 궁금합니다.A. 말씀드린 것처럼 컴퓨터로 그림을 그려왔다 보니 제 그림은 물감과 같은 물성을 가진 기존의 전통적 방식의 그림이라기보단 디지털화된 그림이었고 그것은 사진과 그림 사이의 무언가라고 여겨졌어요. 어릴 적부터 즐겨 했던 사진 작업과 그림 사이의 접점을 연결할 수 없을지 고민하다가 그 경계를 허물거나 모호하게 만들어버리고 싶다고 생각하게 됐어요. 시작은 매우 가벼운 농담처럼 시작됐어요. 베를린에 살 때였는데 뜨거운 햇살이 내리쬐는 공원 위에 동물처럼 널브러져 누워있는 사람들을 보며 ‘너무 뜨겁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어 ‘계란후라이처럼 익어가는 기분을 즐기는 건가?’하는 생각이 들었고, 그날 집으로 돌아가 공원 사진 위에 계란 후라이를 그려 넣었어요. 다 그리고 보니 기대 이상으로 보기 좋았어요. 그 이후로 따분하고 매우 일상적인 장면 위에 어떤 말도 안되는 일이 벌어지는 상상을 떠올렸고, 그 풍경을 사진으로 찍은 뒤 그림으로 구체화하는 방식으로 지금까지 작업을 계속 이어오고 있습니다. 전체 이미지를 미리 구상해서 작업을 하기도 하지만 그동안 기록해 온 사진들 속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작업에 들어가기도 합니다. Q. 그림뿐 아니라 사진, 영상, 글까지 매체에 구애받지 않고 다양한 창작 작업을 하고 계시지요. 형식은 달라도 서로에게 영향을 주는 지점이 분명히 있을 것 같아요. 각 작업은 어떻게 연결되어 있나요?A. 맞아요. 사실 창작의 시작은 그림이었지만 단순히 말해 저는 제 이야기를 어떠한 형식으로든 만들어내길 좋아하는 사람이에요. 때론 그 사실이 제 작업 방향에 고민으로 다가오기도 하는데요. 결국 그 모든 것들이 이야기하는 것은 매우 명료하다고 생각해요. 제 인생이죠. 저도 많은 작가들을 좋아하지만, 그 사람들이 표현해낸 그림의 외적인 것 이상으로 작품 안에 담긴 정신이나 그 그림을 그리기까지 관철해 온 삶의 이야기에 더 집중하는 편이에요. 어떤 평론가분께서 제 이야기를 듣더니 “나훔 씨는 그림의 뒤를 보는 사람이네요.”라고 말하신 적이 있어요. 맞는 것 같아요. 제 작업도 뒷이야기가 궁금해지는 작업이길, 그리고 그 이야기가 사람들의 어떤 감정에 닿을 수 있길 희망해요. 그림은 그림대로 글은 글대로 다가가는 방향은 다르지만 다다르길 바라는 목적지는 결국 어떤 한 지점이 아닐까 해요. Q. 강릉에서 운영 중인 갤러리숍 ‘오어즈(Oars)’에 관한 이야기도 듣고 싶습니다. 2020년 팬데믹 시기에 시작해 어느덧 6년 차가 되었어요. 오어즈의 시작부터 지금까지 어떤 항해를 해오셨는지 이야기 나눠주세요.A. 벌써 세월이 그렇게 됐네요. 좁은 아파트에 그림을 더 이상 쌓아둘 수 없어 창고를 찾던 중 우연히 아내와 들러 덜컥 계약해 버린 공간이 지금의 오어즈입니다. 그땐 낡은 2층 공간에 이렇게 많은 분들이 드나들게 될 것이라고는 정말 상상도 못 했어요. 말씀드린 것처럼 처음 목적은 창고였으니까요. 그러다가 생각보다 공간이 남아서 천천히 평소 하고 싶었던 것들을 덧대다 보니 여기까지 왔어요. 지금 돌이켜 생각해 보면, 초기엔 공간도 휑하고 도저히 볼 것도 없어서 되려 팬데믹 때 문을 열어 다행이었다 싶기까지 해요. 저희 둘다 공간을 운영해본 경험이 전무한 사람들이라 그저 소꿉놀이하듯 공간을 채워나갔던 것 같아요. 그전까지만 해도 저나 아내나 서로 접점이 전혀 없는 각자의 일을 하던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오어즈의 방향성을 잡는 데에도 시간이 꽤 필요했어요. 대화를 통해 우리다움은 무엇일지 자주 이야기했어요. 결론은 작위적으로 뭔가를 보여주려고 하지 말고 강릉에서 살아가는 우리의 일상을 자연스럽게 공간에 녹이자는 방향으로 정했어요. 그게 우리가 잘, 그리고 오래 나아갈 수 있는 방향이라고 생각했죠. 공간을 운영하면서 정말 많은 분들을 만날 수 있었고 몇몇 분들과는 깊게 인연을 맺게 되기도 했어요. 이제는 정말 큰 의미가 되어, 오어즈가 없었다면 지금의 우리를 상상할 수 없을 정도죠. 관심 갖고 방문해 주시는 분들이 많아서 늘 감사한 마음입니다. Q. 작가님의 글 중 ‘쏜살같이 지나가 버리는 세월을 어떻게든 붙들어보려는 행위가 내 창작의 근원이 아닌가 생각한다.’라는 문장이 오래 마음에 남았습니다. 다가올 미래를 상상하는 일보다, 지나간 시간을 되새기려는 마음이 더 큰 창작의 토대가 된다는 점이 흥미로웠어요. 과거와 현재, 미래 중 그 어느 하나를 더 중요하다고 말하긴 어렵겠지만, 작가님에게 이 세 시간은 각각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궁금합니다.A. 과거는 지나간 오늘이고, 전 그런 오늘을 충실히 기록하고 정리해 과거로 보내고 싶다는 생각을 해요. 미래는 아직 오지 않은 변덕스러운 날씨와도 같아서 제가 아무리 계획하고 방향을 잡아보려 해도 어쩔 도리가 없는 것이죠. 하지만 그 미래에 도착해있을 때 적어도 허탈감이나 허무에 빠지지 않고 작지만 귀중한 몇 가지를 손에 쥐고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에요. 지천으로 널려있고 아무에게도 쓸모가 없지만 나에게 만큼은 의미 깊고 소중한 조약돌을 모으듯 창작합니다. 물론 그것이 어떤 보편적 가치를 지니게 되어, 또 다른 누군가에게 작게나마 위로나 웃음이 될 수 있다면 그보다 기쁜 일은 없겠죠. Q. 번아웃과 우울이라는 내밀한 감정은 작가님을 베를린으로 이끌었고, 그 시간을 지나며 결국 지금 삶의 방향을 새롭게 그리게 되셨지요. 그때와 비슷한 시간을 겪고 있는 이들에게 전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면 들려주세요.A. 대답이 조심스럽네요. 힘들면 멈춰도 괜찮아요. 인생 길어요. Q. 마지막으로, 앞으로 새롭게 도전해 보고 싶은 작업이나 계획하고 계신 일이 있다면 들려주세요.A. 이제 아이를 키운 지 100일 정도밖에 되지 않았는데 참 많은 것을 느끼고 있어요. 육아를 하면 보통 자기 일이 뒷전이 된다고 하죠. 저도 처음엔 그런 생각이 들었는데 다시 생각해 보니 이 모든 과정이 저에겐 새로운 영감의 근원이 될 수도 있겠다 싶었어요. 아이도 이 세상이 처음이지만, 저도 아버지로 살게 된 인생이 처음이다 보니 처음으로 맞닥뜨리는 일들에 울고 웃고… 하루하루가 롤러코스터 같은 하루거든요. 아이를 키우면서 느끼는 그 복잡미묘한 감정들을 처음 아버지가 된 사람의 입장에서 차근차근 기록해 어떤 식으로든 펼쳐 보이고 싶다는 바람이 있습니다. 김나훔 작품전 《동쪽에서》는 2025년 7월 4일부터 7월 20일까지, 녹사평 티더블유엘 4층 handle with care 에서 진행됩니다. Editor 오송현Photo 김나훔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