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하는 두 세계, 유리와 책을 잇는 작업은 손에 쥘 수도 없고 만질 수도 없는 '빛'을 활자로 가득한 책과 합하는 일이라 꿈꾸듯 이어져갔습니다." 유리와 이끼로 가득한 환상의 서점. 공간의 풍경만큼이나 이 세계를 일군 창작자의 마음 역시 꿈속을 유영하는 듯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덩달아 가슴이 뛰었습니다. 그런 마음으로 꾸려낸 풍경은 얼마나 아름다울까요. 그렇게 이 서점이, 아니 이 전시가 그토록 기대되었나 봅니다. 독서라는 행위를 넘어서 책을 둘러싼 모든 것을 좋아한다는 김은주 작가. 《유리와 이끼 서점》 전시를 준비하며 좋아하는 두 세계를 어떻게 하나로 이어갔는지, 그 과정에서 펼쳐낸 이야기를 여기 나누어봅니다. Q. 안녕하세요, 작가님. 2022년 가을 《유리 소곡 小曲》 전시 이후 오랜만에 인사드려요. 4년이 지나 올해도 비슷한 계절에 함께하게 되었네요! 동네의 식물들과 눈맞춤하고, 라디오를 즐겨 듣고, 아침이면 요가로 차분히 몸을 깨우고…. 인터뷰를 준비하며 작가님의 소소한 루틴을 수집하는 시간이 꽤 즐거웠는데요. 여전히 효자동의 같은 작업실에서 변함없는 일상을 보내고 계신가요?A. 네, 여전히 효자동 작업실에서 유리 작업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지금은 3층 옥탑으로 이동하였네요. 빛이 좀 더 풍성하게 들어오고 대신 여름에는 엄청난 열기를 고스란히 담아내는 곳입니다(웃음). 아침에는 주로 생존 요가를 하고, 작업을 합니다. 산책이 필요하면 경복궁을 크게 한 바퀴 도는 편이고요. 경복궁 담벼락 옆으로 다양한 식물들이 심겨 있고 친절하게 식물 이름표도 붙어 있어서, 계절마다 눈에 띄는 식물 이름을 알게 되어 좋아요. 물론 100년도 넘은 큰 나무들이 넘실거리며 움직이는 모습을 보고 그 소리를 듣는 것도 큰 기쁨입니다. Q. 잡지 기자에서 단행본 편집자로, 그리고 유리 공예가가 되기까지의 이야기는 이제 다들 익히 알고 계실 것 같아요. 오랜 직장 생활을 뒤로하고 작업자의 삶을 선택한 지도 어느덧 시간이 꽤 흘렀는데요. 이전과 비교했을 때 지금 가장 만족스러운 점은 무엇인지, 반대로 가끔 그때가 그리워지는 순간도 있는지 궁금합니다.A. 둘 사이의 어떤 차이를 깊이 생각해 본 적은 없지만, 책과 유리는 제가 참 좋아하는 두 세계입니다. 작업을 하면서 가장 만족스러운 건 온전한 제 시간이 많아졌다는 점이에요. 그러다 보니 무언가를 오래 바라보고, 한참 머무를 수 있는 시간도 많아진 것 같아요. 직장 생활이 이 음에서 저 음으로 옮겨 다니기 바쁜 연주였다면, 지금은 한 음에서 길게 머무는 연주를 하는 기분이랄까요. 물론 작업 마감에 닥쳐서는 이리 뛰고 저리 뛰는 불난 호떡집 상황은 비슷하고요(웃음). 반대로 작업하면서는 독서량이 많이 줄었어요. 독서 근력이 급격히 떨어져서 책을 길게 못 읽고 있는데, 마음껏 책을 읽던 시간은 가끔 그립습니다. Q. 이번 전시는 오수 작가님과 함께하는 듀오전이죠. 먼저 두 분의 관계부터 짚고 넘어가야겠습니다. (웃음) 작업을 함께하기도 하고 서로의 일상을 나누기도 하는, 좋은 동료이자 가까운 친구처럼 보여요. 두 분은 처음 어떻게 인연을 맺게 되었나요? A. 늦은 나이에 작업을 시작한 저에게 오수 작가는 처음 사귄 작업 친구예요. 서촌에서 처음 만났습니다. 제 전시에 찾아온 것을 계기로 제가 일 관련으로 인터뷰를 청했고, 마침 그즈음 오수 작가가 서촌으로 이사를 오면서 자연스럽게 동네 친구가 되었어요. 약속한 만남보다 약속하지 않은 자연스러운 만남이 많아지면서 작업과 일상을 골고루 나누는 친구 사이가 되었습니다. 서로 다른 성향이지만 그 다름이 언제나 기분 좋음으로 마무리 지어지는 것이 신기하고 고마워요. Q. 《유리와 이끼 서점》이라는 제목처럼, 이번 전시의 중심에는 ‘책’이 있습니다. 그림책부터 문진, 마음에 드는 문장을 담는 편지봉투까지. 책을 둘러싼 여러 장면을 유리로 옮기셨는데요. 이번 전시에서 만날 수 있는 작품에 대해 자세히 이야기 나눠주세요.A. 저에게 책은 여러 가지 의미를 지니지만, 이번 전시에서 무엇보다도 유리로 구현해 보고 싶었던 것은 유리 안에 활자와 문자를 넣는 일이었어요. 어떻게든 책의 물리적 형태를 유리로 만들어보고 싶다는 것이 전시의 출발점이었습니다. 먼저 책의 얼굴인 표지를 만드는 것부터 시작했어요. 평소에 좋아하는 책들의 표지를 여러 가지 유리 기법을 이용해 만들었습니다. 서점에 가득 꽂혀있는 책들을 상상하면서 그 일부를 구현했으니 서점에서 책을 구경하고 고르듯이 봐주셨으면 좋겠어요. 어렸을 때부터 책은 제 좋은 친구였습니다. 그래서인지 좋은 구절을 만나면 누군가에게 편지를 쓰고 싶어지는 순간이 많았어요. 그 마음으로 유리 편지봉투를 만들었습니다. 좋아하는 자신만의 글귀를 넣어도 좋고, 간직하고 싶은 식물을 넣어도 좋을 것 같아서요. 너무 투명하니 비밀 편지는 안 되겠지요? 그렇게 봉투를 만들다 문득 파도를 담아보고 싶었어요. 바다를 담은 봉투. 유리라서 가능한 세계겠죠? 파도 유리 봉투 안에 물을 넣으면 정말 나만의 작은 바다를 가진 것 같아서, 더운 여름 작업실 안에서 잠시 시원한 순간을 누리기도 했습니다. 다양한 오브제 형태의 문진도 만들었어요. 꼭 책을 묵직하게 누르지 않아도 기억해야 할 한 장의 종이나, 일상의 소품을 지그시 눌러놓고 싶을 때 사용하면 좋을, 가볍고 무거운 유리 문진들입니다. 그중 가장 마음에 드는 건 물방울 문진이에요. 유리가 볼록렌즈의 성격이 있어서 책 위에 놓으면 활자가 크게 보여요. 돋보기 기능은 귀여운 덤입니다. 물방울은 만들어 놓고 보니 눈물도, 커피도, 빗방울도 될 수 있어서 책 위에 올려두고 바라보는 맛이 좋습니다. 그리고 ‘유리와 이끼’가 있는 서점이라는 환상적이고 조금은 마법적인 분위기를 내고 싶었어요. 그래서 오수 작가와 다른 소재를 이용해 커다란 물방울과 꽃을 삼킨 새, 얼음꽃 등의 커다란 모빌을 만들어서 그 안에서 책을 읽을 수 있는 공간을 함께 꾸려보았습니다. Q. 그중에서도 좋아하고 아끼는 책의 표지를 유리 위에 옮긴 작업이 눈에 띄어요. 활판인쇄 특유의 불규칙한 눌림과 고르지 않은 잉크의 농도, 번짐까지 유리로 표현하고 싶었다고요. 여러 번의 시도를 거치며 표현 방식도 조금씩 다듬어졌을 것 같은데요. 처음 구상했던 모습에서 지금의 작업에 이르기까지 어떤 변화가 있었나요?A. 유리를 시작하면서부터 언젠가는 유리로 책의 세계를 만들어보고 싶다고 늘 생각했던 것 같아요. 너무도 다른 물성을 지녔기에 쉽지는 않았지만, 오래 궁리하면 방법이 생기지 않을까 생각했던 것 같아요. 전시 주제가 ‘서점’으로 정해지면서 단순히 서점의 분위기를 내기보다는 책의 물성과 요소를 유리로 구현해 보고 싶기는 했어요. 그래서 책의 몸이라 할 수 있는 표지와 책등, 뒤표지의 구성을 모두 담아내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제 작업이 평면적이다 보니 처음에는 표지를 구현하는 데 집중했는데, 하나둘 만들다 보니 표지가 많아졌어요. 정말 서점처럼 한곳에 주르르 모아놓고 싶어져서 작업의 개수도 자연스럽게 늘어났습니다. 그렇게 책의 형태로 조금씩 진화하게 된 것 같아요.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만들고 보니 ‘빛’을 담아내는 책이라는 재미있는 요소가 생긴 것 같아서 좋았습니다. Q. 오수 작가님과 하나의 공간을 함께 채워가는 과정에서 주고받은 이야기도 많았을 것 같아요. 작품을 구상하며 어떤 대화를 나누셨는지, 또 서로의 작품을 염두에 두고 새롭게 시도한 부분도 있는지 궁금해요. A. 오수 작가는 어릴 때부터 시각예술과 조형을 공부해 온 사람이고, 저는 문자의 세계에만 살았던 사람이라 ‘서점’이라는 주제 앞에서 둘이 완전히 다른 생각을 두고 작업을 한다는 것을 알고 너무 재미있었어요. 오수 작가는 ‘서점’이라는 공간이 불러일으키는 이미지를 계속 떠올리며 시각적인 작업을 하고 있었고, 저는 문자, 활자, 글자, 그리고 고전적인 책의 형태에 집착하면서 작업하고 있더라고요. 서로 그 차이에 놀라면서 “아, 이렇게 다르게 가도 재밌겠다”는 이야기를 나눴어요. 그런데 신기하게도 구체적인 작업 형태를 말하지 않았는데 식물이나, 돌, 고서, 옛 이미지 같은 모티브를 각자의 작업 방식으로 작업하고 있다는 걸 알고는 무척 재미있었습니다. Q. 작업을 하다 보면 분명 지치는 순간도 있을 텐데, 그럼에도 계속 작업을 이어가게 하는 힘은 과정에서 만나는 작은 즐거움이 아닐까 싶어요. 판유리를 자르고 겹치고 가마에서 열을 가하는 여러 단계를 거쳐 하나의 작품이 완성되기까지, 작가님이 가장 좋아하는 순간은 언제인가요? A. 작업의 과정을 잘게 쪼개어 의식하지는 않는 편이지만, 그래도 늘 가마를 작업을 넣고 다음 날 결과를 확인하는 순간이 가장 좋은 것 같아요. 가마를 소성할 때 아주 작게라도 항상 새로운 것을 하나씩 넣어보는 저만의 루틴이 있는데, 예상대로 나오는 작업도 좋지만 “와…이렇게 나온다고?”하고 놀라움을 주는 경우도 있어서 작업자로서 ‘변수’를 즐기는 편인 것 같아요. Q. 서점을 주제로 한 전시인 만큼 이 질문은 빼놓을 수 없겠어요. 지금 《유리와 이끼 서점》의 책장에 딱 한 권의 책을 꽂는다면 무엇을 고르고 싶으신가요? 그 책을 처음 읽었던 장소나 당시의 마음, 오래도록 좋아하게 된 이유까지 함께 들려주세요. A. 한강 작가의 《빛과 실》이요. 타인의 고통을 자신의 몸과 마음으로 고스란히 느끼시는 분인 걸 알기에, 사적인 일상에 관해 쓴 이 작은 산문이 너무 귀하게 느껴졌습니다. 작은 한옥의 북향방에서 글을 쓰며 바라본 빛에 관한 이야기를 잊을 수가 없어요, 그토록 내향인인 그녀가 서로를 잇는 ‘실’로 희망을 삼고 있다는 것이 여러 가지로 의미 있게 다가온 책입니다. ‘빛’이 서로를 잇는 ‘실’이 될 수 있다는 큰 위안을 준 책입니다. Q. 유리를 이야기할 때면 ‘빛’을 빼놓을 수 없는 것 같아요. 한 인터뷰에서 계절마다 작업실에 들어오는 빛의 방향과 느낌이 다르고, 같은 유리도 아침과 오후에 전혀 다른 모습으로 보인다고 말씀하셨죠. 여름의 빛에서는 강한 생명력과 기세를, 가을의 빛에서는 조금은 쓸쓸한 기운을 느낀다는 이야기도 기억에 남아 있어요. 이번 전시는 여름을 지나 가을로 접어드는 9월에 열립니다. 이번 작품들이 9월의 빛을 만나 어떤 모습으로 비치길 바라시나요?A. 저는 유난히 ‘빛’ 타령을 많이 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유리를 시작하기 전부터도 그랬던 것 같은데 여름을 보내고 가을을 맞이하는 계절에 상상으로 가득한 서점을 꾸리게 되어 기쁩니다. 여행지에서 좋은 서점을 만나면 호기심이 생기고 안심되는 마음이 동시에 들듯이, 《유리와 이끼 서점》에서도 여러분이그런 마음으로 어떤 신비로운 시간 속에 쑥 빠져들 수 있기를 바랍니다. Q. 언젠가 꼭 책을 주제로 전시해 보고 싶다고 여러 번 이야기해 주셨어요. 오래 마음속에 두었던 전시를 마침내 많은 이들과 나누게 된 기분이 어떠신지요! 그리고 이번 전시를 마친 뒤에는 또 어떤 새로운 이야기를 유리 위에 써 내려가고 싶으신지 궁금해요.A. 인터뷰할 때마다 ‘책’ 이야기를 하게 되었던 것 같아요. 평생 좋아해 온 세계였으니까요. 책을 많이 읽었다기보다는 책을 둘러싼 모든 것을 좋아했습니다. 딴 이야기 같지만, 책이 없던 시절에는 그림이나 스테인드글라스가 성경의 역할을 했다는 사실이 제 유리 작업에 가장 큰 힘이 되었습니다. ‘빛’이라는 비물질의 요소가 사람에게 믿음과 고백과 위안이 된다는 사실이 제가 유리 작업을 하는 큰 이유인 것 같아요. 그래서 이번 전시는 여러 가지로 제게 잊을 수 없는 페이지가 될 것 같아요. 모자란 점도 많고 생각만큼 구현되지 않은 것도 많았지만, 유리와 책, 좋아하는 두 세계 안에서 행복했습니다. 김은주&오수 작품전 《유리와 이끼 서점》은 2026년 9월 4일부터 9월 13일까지, 녹사평 티더블유엘 4층 handle with care 에서 진행됩니다. Editor 오송현Photo 이승아, 김은주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