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주 콜렉션을 준비하며 이따금 어떤 얼굴들을 머릿속에 그려보곤 했습니다. 자신의 속도와 보폭으로 다양한 층위를 쌓으며 살아가는 우리 주변의 동료와 친구들입니다. 귀하고 소중한 날 지어 입은 명주 옷이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의 매일 매순간을 기념하는 조용한 후광이 되길 고대하며, 각자의 영역에서 활발히 활동하는 4명의 동시대 여성을 만나보았습니다. 명주로부터 시작된 그 이야기를 여기 함께 나눕니다. 《Layered on Layers》 Interview Series01. Studio Ohyukyoung 오유경 대표02. 두오모 허인 셰프03. 박선영 컬럼니스트&모더레이터&오거나이저04. 믹히 타투이스트 Q. 박선영님의 이름을 기억하게 된 건 오가타 신이치로에 대한 글을 읽은 후였습니다. 예술과 디자인, 건축, 여행에 대한 글을 쓰는 컬럼니스트로 언제부터 활동을 시작하셨나요? 어려서부터 잡지 매체에 대한 동경을 갖고 있었어요. 언젠가 나도 보그나 바자 같은 매거진에 글을 쓰고 싶다는 바람을 늘 갖고 있었죠. 대학원 시절, 1년을 휴학하고 파리에서 생활해 볼 기회를 만들었어요. 그때 파리에서 만날 수 있는 사람들을 인터뷰해보자는 생각이 들었고, 바자의 피처 디렉터에게 제안서를 보냈어요. 그렇게 난생 처음 직접 섭외해서 인터뷰를 한 사람이 프랑스 건축가 도미니크 페로였고요. 당시 그는 국내에 이화여대 컴플렉스로 이슈가 있었고, 퐁피두에서는 그의 회고전이 열리고 있었죠. 생애 첫 글이 여덟 페이지에 걸쳐 특집으로 실렸어요. 2008년의 그 일이 컬럼니스트로서의 첫 시작이에요. 그 이후 파리에서 줄리엣 비노쉬, 소피 칼, 사라 문, 알랭 드 보통을 인터뷰하면서 인터뷰라는 장르가 저에게 의미가 되었죠. Q. 모더레이터로서 다양한 브랜드, 작가분들과 함께 일하고 계시죠? 또 ‘라이프스타일의 사적인 조언자’라는 설명으로 식스체어스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계십니다. 연관이 있지만 사뭇 다르기도 한 여러 역할을 대하는 공통점과 차이점이 있다면 무엇일까요?오랜 시간 에디터 일을 하다 보면 훈련하듯 쌓이는 것들이 있어요. 기획과 글쓰기는 물론 다양한 것에 대한 관심, 비주얼을 다루는 일이죠. 10년 넘게 일을 하다 보니 일의 외연을 넓히고 싶다는 욕구가 생겼고, 자연스런 모색 중에 식스체어스, 아파트먼트 스토어 같은 일들을 벌이게 됐어요. 결과물이 글로써만 발생하는 컬럼니스트와 다르게 모더레이터나 팝업 형식의 스토어 운영은 다채로운 사람들을 직접 대면할 기회가 생겨요. 거기서 발생하는 생생하고 직접적인 반응이 재미있어요. 글쓰기와 기획을 베이스로 두고 조금씩 역할의 외연을 넓혀가는 중이에요. 일종의 씨를 뿌리 듯이요. '이 일도 해볼까? 저것도 내가 할 수 있을까? 재미있겠네?' 하면서 하나씩 시도해보는 과정인 것 같아요. 글을 쓰는 일과 그 외 기획자, 모더레이터로서의 일 모두 information과 inspiration을 제공해야 한다는 공통점이 있어요. 실제 사는 집에서 숍을 열어보는 것, 작가의 작업실에서 전시를 여는 행위 등이 참신한 영감의 차원이라면 스피커가 전달하는 정보나 물건이 가진 히스토리 등은 실용적인 정보의 영역을 담당하지요. Q. 오늘 인터뷰도 직접 기획하신 김동욱 작가님의 전시를 배경으로 진행하고 있습니다. 어떤 계기, 혹은 의도로 시작된 전시인가요? 지난 봄, 지인의 소개로 이곳 김동욱 작가님 스튜디오에 놀러오게 되었어요. 커다란 벽에 붙은 미완의 캔버스, 그 위에 리드미컬한 붓질과 과감하면서도 섬세한 컬러가 너무 인상적이었죠. 완성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그림들의 충동 같은 것이 느껴졌달까요. 작업실 바닥에 쌓인 작품들, 물감을 짜놓은 팔레트와 붓 같은 도구들이 만든 풍경이 늘 이상적으로 그려온 페인터의 스튜디오 그 자체였죠. 물론 '잔잔한 카오스'를 내뿜던 작품들의 느낌도 너무 좋았고요. Q. 공간 또한 예사롭지 않아 보입니다. 이 공간이 일제강점기 동양척식주식회사 인부들의 기숙사라는 히스토리가 흥미로웠어요. 오래된 나무 천장이 만들어내는 드라마틱한 공간감도 서울에서는 쉽게 경험할 수 없는 것이었죠. 순간적으로 '이곳에서 전시를 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 작가님께 제안을 드렸는데 흔쾌히 공감해주셨어요. 함께 작품을 고르고, 나름의 시퀀스를 만들어 벽에 걸어 두는 과정도 무척 즐거웠어요. 작품이 시작되고 완성된 공간 안에서 작품과 장소의 합일이 친밀한 충돌 같은 걸 만들어내는 듯해요. 전시장을 찾아온 분들이 좋아해주시는 지점도 그런 부분이에요. 작가의 작업실이라는 내밀한 공간에 와서 시간을 보내고 작품을 경험하는 걸 흥미롭게 느끼시는 것 같아요. 전시 기간 동안 매일 이곳에 나와 있는데, 어느 때는 뉴욕의 로프트 같기도 하고 어느 날은 일본 시골의 산장에 있는 기분이 들어요. 저만 느끼는 게 아닌지, 어떤 분께서 마쓰이에 마사시의 소설 <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가 떠오른다고 하시더군요. Q. 업무 외 사적인 영역을 포함하여, 스스로를 묘사한다면 어떤 단어들을 더하고 싶으신가요?제 계정이기도 한 misuleye(미술아이)는 20년 넘도록 쓰고 있는 아이디예요. '미술을 보는 눈'이라는 뜻으로 만들었는데, 어쩌다 보니 저라는 존재와 너무 밀착되어 버렸어요. 조금 더 의미를 넓힌다면 '아름다움을 보는 눈'이라고 하고 싶네요. 근데 제가 보는 아름다움의 영역은 주류나 센터 보다는 '살짝 경계 밖에 있는' 것들에 더 가까워요. 이건 컨셉이라기 보다는 제 성향인 것 같아요. 중심이 아닌 언저리의 어떤 것에 더 눈길이 가고, 그런 공간이나 물건을 찾아 헤매는 걸 좋아하죠. 스스로를 묘사하는 단어들로는 밸런스, 공간, 인터뷰, 독일, 회화, 글쓰기, 드레스 정도가 될 것 같아요. Q. 평소 스타일에서도 자기다움과 유연한 시도 사이를 자연스럽게 오간다고 느꼈습니다. 옷을 고르고 입는 기준이 있는지, 특히 ‘중요한 순간’의 옷은 어떤 기준으로 선택하는지 궁금합니다. '중요한 순간의 옷'이라는 질문이 마치 저를 꿰뚫으신 것 같아요. 늘 '중요한 순간'을 염두하고 옷을 고르는 편이거든요. 인터뷰이를 만나는 순간이나 기다렸던 여행을 떠날 때, 전시장이나 아름다운 숍에 가는 시간을 넓은 의미의 '중요한 순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럴 때 소재나 디자인, 컬러에 있어 조금은 과감한 포인트를 찾아요. 옷은 무엇보다 편해야 하지만, 자신을 드러내는 요소로써 한 가지 포인트 정도는 예술작품 같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요. 추상화의 패턴 같은 실크 드레스, 섬세한 바느질이 인상적인 네이비 실크 스커트, 블랙 니트 크롭탑... 요즘 같은 더위에 잘 어울려 즐겨 입는 아이템이에요. 그리고 이상하게 아무리 화려하거나 야한 옷도 제가 입으면 차분하게 톤다운시키는 측면이 있어서 너무 베이직한 옷은 제게 맞질 않아요. Q. 피드에 종종 등장하는 어머님의 모습, 모녀가 함께하는 정경이 아름답습니다. 스타일에 대해 어머님의 영향을 받기도 하셨나요?어머니는 여러모로 무척 멋쟁이세요. 늘 자신을 가꾸는 삶을 사시는데, 외형뿐 아니라 내면을 추스리는 면모에서 더욱 그러합니다. 하루의 시작을 기도와 셀프 마사지, 식물을 가꾸는 걸로 하시거든요. 패션에 있어서도 늘 자기다움을 표현하려 하시죠. TPO에 맞는 옷차림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시고, 그 기준이 무척 명확하세요. 바닷가에 갈 때 입는 룩과 소품, 도서관에 갈 때 입는 옷, 친구들을 만날 때의 옷차림에 대한 기준 같은 거죠. 그런 면은 자연스럽게 영향을 받은 것 같아요. 엄마와 큰딸로서 대화가 무척 많은 편인데, 저희는 최근에 읽은 책이나 작품 이야기, 어떤 인물에 대한 대화가 주를 이뤄요. 대부분 엄마와 딸은 그런 이야기는 잘 안 한다고 하더라고요. 엄마를 보며 제 20년 후를 바라곤 합니다. 강하고 낙천적이지만 여성성을 간직한, 저도 그런 모습으로 나이 들고 싶어요. Q. 이탈리안, 대니쉬, 일본 등 여러 문화적 배경을 지닌 빈티지 콜렉션을 가지고 계시죠? 결혼 전부터 빈티지 가구를 향한 끌림이 있었어요. 월급을 모아 덴마크 서랍장과 의자 하나를 구입한 일이 그 출발이었죠. 결혼을 하며 인테리어가 온전히 내 영역이 되었을 때 본격적으로 콜렉션을 시작했어요. 초반에는 대니쉬 빈티지가 많았고 차츰 오랜 관심이었던 바우하우스와 네덜란드 제품들, 그리고 조명은 극적인 조형성이 돋보이는 이탈리안 램프를 들여 놓게 되었어요. 그저 제 본능에 끌리는 것들을 한데 모아보고 싶었죠. '어울리지 않으면 어쩌지?'라는 불안함은 없었어요. Q. 오래된 작업이나 작품에 마음이 끌리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콜렉션을 선별하고 다듬어가는 기준도 궁금합니다.빈티지 가구에 끌리는 이유는 장인의 시대에서 산업생산 시대로 넘어오는 시기에 처음 만들어진 디자인 제품이라는 점에서, 당시 제작자나 디자이너들의 깊은 고민과 섬세한 만듦새가 느껴져서예요. 그래서 같은 아이템이라도 현재 재생산 되는 것보다 당시의 제품을 찾으려고 노력하죠. 얼마 전 집에 오신 손님께 차와 다과를 내어 드렸는데, 그 모든 세팅을 제가 계산하고 하나하나 모아왔을 것이라 생각하더라고요. 전혀 그런 건 아닌데 말이죠. 80년대 독일 패브릭과 현대의 일본장인이 만든 찻잔, 팔공산의 장작가마에 구워 나온 접시 등 그때그때 끌려서 구입한 것들이 묘하게 어울렸을 뿐이에요. 다른 시대, 다른 지역에서 탄생한 것들이 조화를 이루는 장면을 스스로 무척 즐겨요. 이탈리아 조명과 대니쉬 식탁을 함께 놓아보고, 알고 지내는 인테리어 디자이너분이 만들어 준 사방탁자 위에 60년대 독일 세라믹도 올려 두고 보는 그런 행위들이 자연스럽게 콜렉션을 다듬어가는 과정인 것 같아요. Q. 마지막 질문입니다. 명주 콜렉션을 입고서 가고 싶은 장소, 하고 싶은 일이 있나요?명주 장인 허호 선생님에 대한 글 그리고 명주의 역사에 대한 이야기가 무척 인상적이었어요. 실크는 익숙했지만 명주는 접할 기회가 없었죠. 스커트를 매만질 때 그 촉감에서 '천연'이라는 말의 실체가 느껴지더군요. 그 미묘한 짜임이 만들어내는 색감이 작품처럼 다가오기도 했고요. 《Layered on Layers》 콜렉션을 본 순간 많은 분들의 마음과 생각의 노고가 느껴졌습니다. 전시의 소개글처럼 '조용한 후광을 입는다는 것의 느낌'은 처음 경험하는 것이었어요. 이 특별한 옷을 저는 오히려 일상의 편안한 자리에 입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친구를 만나거나 전시를 보러 갤러리에 갈 때, 시원한 서점으로 더위를 피하러 갈 때도 이 옷을 입고 싶습니다. 그런 일상적 공간에서 명주 옷이 더 빛을 발할 것 같거든요. 물론 피부에 옷감이 닿을 때, 살짝살짝 옷감의 펄럭임을 느낄 때 명주를 입었다는 특별한 감각을 만끽하겠죠. 《Layered on Layers - Studio Ohyukyoung 2021 Myungju Collection》은 현재 한남동 Handle with Care에서 진행중입니다.☞ 전시 소개 자세히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