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긋불긋 단풍이 물드는 가을날, 김은주 작가님의 작업실을 방문했습니다. 투명한 유리 위로 햇빛이 가지런히 내려앉은 풍경을 바라보며 작품과 그간의 작업 과정을 찬찬히 돌아보았어요. 그날의 진솔하면서도 따뜻한 대화를 여기 함께 나누어봅니다. Q. 안녕하세요. 아늑한 공간에서 하나둘 빛나는 유리를 보고 있으니 마음이 편안해집니다. 이곳에서의 일과는 어떻게 흘러가나요?A. 작업실과 집이 아주 가까워서 하루에도 여러 번 왕복 출퇴근을 하는 편이에요. 작업실이 주택가 빌라인데 골목 담벼락으로 폭이 10센티미터나 될까 싶은 좁고 긴 땅에 동네 아주머니가 여러해살이 식물들을 정말 오밀조밀, 오순도순 심어 놓으셨어요. 골목길을 들어서면 이 식물들을 눈 맞춤하듯 보는 것이 큰 즐거움이에요. 라디오 듣는 것을 좋아해서 자주 찾는 채널을 틀고, 작업실에 떨어지는 빛을 보면서 하루를 시작합니다. 어깨가 좋지 않아서 1시간 단위로 작업을 끊어서 하는 편이에요. 잠시 쉬는 시간에는 담벼락 정원의 식물을 보거나, 골목 끝에 있는 신익희 가옥 툇마루에 앉아 오래된 감나무를 보면서 허리도 어깨도 펴줍니다. 얘기하다 보니 제가 효자동 골목길 인프라를 작업에 많이 이용하고 있네요. Q. 오랜 시간 책을 만드는 편집자로 일해오시다 몇 해 전 ‘유리 공예’라는 새로운 챕터를 여셨지요. 유리를 접하고 본격적으로 작품 활동에 임하시게 된 계기가 궁금합니다.A. 오랫동안 직장생활을 해오는 동안 숨구멍처럼 여러 가지 취미생활을 전전했는데 유리는 그중 저랑 제일 안 맞는다 생각했었어요. 나무나 섬유처럼 따듯한 소재를 좋아했는데, 유리는 그에 비하면 차갑고 다루면서 위험한 요소도 많아서요. 그런데 편집일을 그만두고 개인적으로 힘든 시기에 김기라 작가님께 유리를 배우면서 특유의 물성과 빛에 점점 빠져들었고, 차가운 소재가 가마에서 구워져 나오면 따듯한 빛으로 바뀌는 것이 큰 위안과 즐거움을 주었어요. 그러다 우연히 〈유리편집〉이란 제목으로 첫 번째 전시를 하게 된 뒤로 쭉 작업을 하고 있어요. 유리는 모래나 소다와 같은 혼합물을 고온에서 녹여 냉각한 물질이지만, 빛을 담아내는 물성이라는 점에서 사람의 영혼이나 정신을 건드리는 재료라고 생각했던 게 작업을 이어온 큰 이유가 되었던 것 같아요. Q. 이번 전시에서 소개하는 신작인 <다우> 시리즈에 관해 소개 부탁드려요.A. 처음 전시를 준비하면서 ‘달’을 주제로 작업하면 어떨까 생각했어요. 기존 모빌 작업에 달 시리즈가 있었고, 달무리를 그리면서 만든 수묵 시리즈와 연결될 것 같기도 했고요. 좋은 기회에 두 번이나 ‘차’ 전시를 하게 되면서 다구에 관해서도 조금씩 공부할 기회가 있었는데, 찻자리에서 ‘다우’라는 존재가 유독 정이 가더라고요. 예전에는 작은 동물상을 찻자리에 놓기도 했고, 요즘에는 계절을 느낄 수 있는 잎이나 꽃, 오브제들을 놓는데 저는 작은 달 아래서 차 마시는 풍경을 떠올리며 이번 시리즈를 만들었어요. 작업을 하다 보니 선에 움직임을 주기 위해 금속 선을 유리와 합치면서 유리 조각 혹은 스탠딩 모빌처럼 커다란 오브제까지 확장하게 되었네요. Q. 둥근 달과 지저귀는 새, 투명한 이슬… 차고 딱딱한 유리의 물성과 달리 작가님의 작품은 곁에 두고 오래 볼수록 따뜻하게 다가옵니다. 작업의 영감은 주로 어디서 얻으시나요?A. 회사를 그만두고 하루하루를 스스로 운영하면서 막막할 때도 많았는데, 작업을 하면서는 뜻밖에도 계절의 흐름이나 오늘의 날씨, 구름의 움직임, 바람의 방향 같은 것들을 바라보고 느끼는 것만으로도 가득 차는 느낌이었어요. 특별히 자연에 애착을 두거나 애정을 갖는 유형의 사람이 아니었는데요. 그런 것들을 오래 바라볼 시간과 여유가 생기게 된 것 같아요. 그 속에서 어떤 형태를 가져온다기보다는 순간의 느낌을 유리로 옮겨오고 싶은 마음이 있어요. Q, 제작 과정을 자세히 들려주실 수 있나요?A. 블로잉과 달리 제가 하는 유리 작업은 한 번 가마에 들어가면 손으로 컨트롤할 수 없기에 어찌 보면 형태를 만들기에 제한이 많습니다. 그런데 또 그게 이 작업의 매력이기도 한 것 같아요. 색유리를 다양한 형태로 조합해서 굽는 방식을 기본적으로 좋아하고, 고운 유릿가루를 뿌려서 무늬를 넣는 방식도 수묵화 느낌이 나서 좋아합니다. 유리가 너무 매끈한 소재이다 보니 최대한 질감을 주는 방식을 선호하는데요. 이번에 새롭게 만든 스탠딩 오브제는 금속파이프와 금속 봉을 이용한 방식이에요. 금속이 고온에서도 녹지 않고, 합쳐서 구워도 유리를 깨지지 않게 하는 성질이 신기하고 재미있어서 제작해보았습니다. 유리는 선의 느낌은 내기 힘든 재료인데 금속과 함께 작업하니 선과 움직임이 동시에 생겨서 흥미롭게 작업했어요. Q. 유리 식기도 형태와 질감이 더욱 다채로워졌어요. 이번에 새롭게 소개하는 작업이 있다면 소개 부탁드립니다.A. 식기는 실용성을 갖춰야 하다 보니 형태나 크기를 고민하게 되었고, 자연스레 볼이나 큰 접시 작업으로 이어졌어요. 유리는 투명함도 좋지만, 특유의 불투명함도 매력적이어서 기포를 많이 내기도 하고 스테인드글라스에 쓰는 유리를 고온에 구워 불투명하지만 새로운 질감을 내보려 했습니다. Q. 작가님의 서정적인 작품을 좋아하시는 분들께 이번 전시가 특별히 반가운 소식이 될 것 같아요. 관람객분들에게 전하고 싶은 메시지가 있으실지요?A. 유리는 생활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소재이기도 하고, 종교미술에서 오랫동안 정신적인 재료로 쓰이기도 했습니다. 유리 특유의 투명성은 빛을 그대로 통과시키면서 동시에 어떤 환상을 갖게 해요. 아마도 종교미술에서는 그걸 ‘영성’으로 이용한 것일 테고요. 매일매일 유리를 만지면서도 햇빛에 비친 그림자마저 찬란한 유리를 보고 있으면 정말 설렙니다. 저는 순간주의자라고 할 만큼 순간을 중요하게 생각하지만, 짧은 시간 속에 영원성이 깃들어 있다고 생각해요. 찰나에 얻은 힘 덕에 앞으로 한 걸음 나아가기도 하니까요. 제 작은 유리 조각 작업이 여러분들에게 빛나는 순간을 느끼게 해주는 빛의 오브제가 되기를 바랍니다. 《유리 소곡 小曲 - 김은주 작품전》은 2022년 10월 30일까지 한남동 handle with care에서 진행됩니다.☞ 전시 소개 자세히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