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이 유독 포근했던 겨울날, 설레는 마음을 안고 이수빈 작가의 작업실을 방문했습니다. 그간의 안부로 시작해 다가올 전시에 관한 이야기를 차근히 나누어보았어요. 평온한 표정을 머금은 동물 친구 덕에 마음마저 따듯해졌던 시간을 여기 함께 나누어봅니다. Q. 안녕하세요. 처음 인사드립니다. 작가님과 〈Soft Shape〉에 관해 소개 부탁드려요.A. 안녕하세요. 저는 나무 작업을 하는 이수빈이라고 합니다. 주로 조각도와 같은 수공구를 이용해 나무를 깎아나가는 방식으로 작업합니다. 그러다 보면 제가 만드는 것들이 주로 곡선으로 완성돼요. 반듯한 직선으로 외형을 따더라도 무수한 칼질을 하면서 작고 세밀한 곡선들을 새기게 되는 셈이랄까요. 흔히 곡선은 자연의 선이라고 하지요. 자연의 일부인 나무에 또 다른 곡선을 새기는 일, 그게 제가 생각하는 나무 작업이더라고요. 그렇게 만든 것이 주로 둥글고 부드러운 모양을 띠고 있다는 점도 재미있었어요. ‘아마도 내가 바라는 지향점을 그리기 때문이겠구나, 둥글고 부드러운 사람.’ 그렇게 이름 붙이게 됐어요. 나무로 만든 부드러운 모양, soft shape. 주로 동물을 모티브로 한 월 행잉 조각, 서가 용품, 오브제 등 곁에 두었을 때 마음이 부드러워지는 사물을 만들어 나가고 있습니다. Q. 작업실 곳곳을 지키는 평온한 표정의 동물 조각들이 인상적이에요. 본격적으로 목공예에 입문하시게 된 계기가 궁금합니다.A. 원래 저는 잡지 기자로, 출판 편집자로 일하며 글을 다루고 책을 만들어왔어요. 한편으로는 손으로 하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관심이 많아 틈나는 대로 이것저것 배우기도 했는데 그러다 목조각가인 형부 작업실에 다니며 나무 작업을 접하게 됐어요. 주로 활자로 표현하는 일만 해오다가 시각적으로 표현하고 양감이 있는 물건을 만드는 게 생각보다 쉽지 않으면서도 재미있었어요. 무엇보다 문장을 다듬어 이야기를 짓는 편집 일과 모호한 덩어리를 깎아 의미 있는 무언가로 만들어가는 나무 작업에 통하는 면이 있다고 생각했고요. 또한 반대되는 지점도 있었어요. 글을 다루는 일은 중간에 멈추면 다시 돌아와 멈춘 곳부터 이어가기가 쉽지 않아요. 다시 책상에 앉을 때쯤엔 이미 생각과 마음이 달라져 있기 때문인데요, 반면 나무를 깎는 일은 돌아와 멈췄던 그 자리에서 이어갈 수 있다는 게 좋았어요. 새로운 시선으로 전체를 보게 될지라도 그것은 전환이지 이제껏 했던 것을 뒤엎는 건 아니더라고요. Q. 전반적인 작업 과정을 들려주세요. A. 작업 과정을 단순하게 나눠보면, 스케치한 뒤 외형을 재단하고, 끌과 망치로 쳐서 형태를 잡아가고 조각도로 세밀하게 깎아나가는 단계를 거쳐요. 그중 물리적인 시간을 가장 많이 쓰는 건 역시 깎는 단계이고(!), 가장 즐거울 때는 구상과 스케치 단계, 그리고 가장 마음을 많이 쓰는 건 동물의 표정을 새길 때입니다. 주로 동물을 모티브로 한 조각을 많이 하다 보니 동물과 관련된 책을 많이 찾아보는데요, <동물 문구 시리즈>를 구상할 때는 동물을 이야기 소재로 한 동물 문학을 많이 읽었고, 요즘에는 동물 종류를 파악하고 종별 특징을 명확히 알기 위해 동물백과사전을 틈틈이 들춰봐요. 그러다 보면 ‘아, 요 녀석을 만들고 싶어!’ 하고 눈에 쏙 들어오는 친구들이 있답니다.표정을 새길 때는 한 가지 표정으로 단정되지 않았으면 하는 생각에 오래 고심하게 돼요. 절에 가면 불상을 유심히 보는 편인데, 부처의 얼굴은 완전히 미소 짓지 않으면서도 깊은 생각에 잠긴 듯해요. 그래서 보는 사람의 마음에 따라 여러 방향으로 읽히는 것 같아요. 저 역시 동물들이 평안한 상태였으면 하지만 그렇다고 확실하게 웃고 있거나 안도한 표정으로 새기지는 않으려고 해요. 보는 사람의 마음에 따라, 혹은 그 사람의 바람에 따라 읽을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Q. 나무를 고르실 때 바닷가에서 직접 유목을 찾아 작업하신다고도 들었어요. 재료를 선택하시는 특별한 기준이 있나요?A. 처음에는 목재상에 가서 잘 건조되고 재단된 제재목을 구해 썼어요. 이건 나무 작업하는 사람들이 가장 쉽게 목재를 구하는 방법이기도 해요. 한데 점차 나무를 단순한 소재로 대하기보다 나무의 생을 아우르는 작업을 해보고 싶다는 욕심이 생겼습니다. 길쭉한 네모 판재로 정돈된 재료로서 나무를 접하기보다 이 나무가 어떻게 내게 왔는지, 그에 앞서 어떻게 살았는지를 생각하며 작업하고 싶었어요. 말씀하신 유목 역시 그러한 의미에서 물에 떠내려와 바닷가에 방치된 폐목재인 유목을 주워 조각으로 만들었던 것이고요. 이번 전시 때 선보이는 작품에는 특히 스팔티드 목재를 많이 사용했습니다. 이는 나무의 성장 과정이나 벌목 후에 특정 균이 침투해 나무의 물성이 변화하는 스팔팅(spalting) 현상을 겪은 것인데요. 특유의 무늬가 매력적이지만 물성 변화로 인해 어떤 부분은 바스러지기도 하고, 어떤 부분은 결이 지나치게 복잡해서 작업하기 까다로운 상태가 됩니다. 하지만 이러한 점이 오히려 매력적으로 느껴졌어요. 스팔팅 현상, 옹이나 크랙도 나무 삶의 일부라고 생각해 그 자체의 아름다움을 보여주고자 했어요. 앞으로도 나무의 삶을 아우르고 고유의 물성을 드러내는 식으로 더 많은 작업을 해보고 싶어요. Q. 동물 오브제 시리즈는 프랑스 작가 마르셀 에메의 소설 <벽으로 드나드는 남자>에서 출발하셨지요. ‘벽’이라는 모티브가 따뜻한 심상의 동물과 이어지게 된 배경을 알고 싶습니다.A. 소설은 어떤 남자가 자신에게 벽을 드나드는 능력이 있음을 알게 되고 그 능력 때문에 겪는 일들을 그리고 있는데요, 그 소설이 왜 인상 깊었던 걸까 생각해보니 벽을 드나드는 능력 때문이더라고요. 벽은, 그 단어만 들어도 마치 눈앞이 턱 막힌 것만 같은데 그걸 뛰어넘는 것도 아니고 스며들어 드나들 수 있다니요! 종종 외로움을 넘어 고독할 때, 벽에 갇힌 듯한 느낌이 들 때 가만히 곁에 있어 주는 친구를 생각하며 벽을 드나드는 동물들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무해하고 무구한 동물과 함께 있다면 안전하지 않을까, 포근하지 않을까, 평온하지 않을까 하고요. Q. 하나의 작품을 만드는 데 소요되는 시간도 상당할 것 같습니다. 나무를 깎으실 때 어떤 마음가짐으로 임하시는지 궁금해요.A. 나무를 깎는 데는 시간이 많이 들기도 하고 단단한 나무로 작업하려면 체력적으로 힘들기도 하지만, 한 번 한 번 깎아나가는 과정이 칼자국으로 축적된다는 점이 매력적이에요. 시간은 물성이 없지만 깎아놓은 조각을 보면 시간이 차곡차곡 쌓여 있는 것 같거든요. 또한 계속해서 수정해나갈 수 있다는 게, 시간을 들여 내가 원하는 상을 찾아간다는 게 좋아요. 단박에 얻은 것보다 오래 바라고 찾다가 얻게 된 것이 더 소중하게 느껴지듯 내가 원하는 상을 천천히 찾아가는 과정이 있어 예뻐하는 마음이 생기는 것 같아요. 내가 그리는 것을 찾아가는 심정으로, 작업하고 있습니다. Q. 동물 문구도 탄성이 나올 만큼 귀여운데요. 시리즈를 간단히 소개해주실 수 있나요?A. ‘동물 문구 시리즈’는 목조각을 배우던 초창기에 구상한 것을 점차 종류를 늘려 시리즈로 구축한 것인데요. 평소 문구류나 서가 용품에 관심이 많아 내 손으로 내가 쓸 무언가를 만들어보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책상 위에 두고 늘 볼 수 있는 작은 조각상이지만 문구이기도 하면 어떨까 싶었고, 동물 조각에 기능을 접목해보기로 했습니다. 무게추를 삽입한 문진, 황동 연필깎이 부속을 삽입한 연필깎이 등이 있는데요, 특히 연필깎이는 ‘입에, 코에, 엉덩이에 연필을 꽂아 깎으면 어떨까?’ 하는 약간은 발칙한 상상으로 신체 부위의 특징을 이용해 만들어보았습니다. 특히 꼬리 부분에 연필을 꽂아 깎으면 엉덩이로 연필 톱밥이 배출되는 ‘당나귀 연필깎이’와 ‘고양이 연필깎이’를 많이 좋아해 주시는 것 같아요. 이 시리즈는 앞으로도 매년 새로운 에디션의 동물과 문구를 추가해 나가려 합니다. Q. 핸들위드케어에서 열리는 작가님의 첫 전시입니다. 관람객분들에게 전하고 싶은 메시지가 있으실지요?A. 전시를 준비하며 주로 혼자, 골몰히 작업하는 시간이 길었습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나무를 보며 ‘너를 어떤 동물로 만들어 줄까’, ‘너는 어떤 나무였을까’ 생각하고, 나무를 깎으면서 ‘너는 어떤 표정일까’,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를 생각하다 보면 정말로 혼자인 것 같지는 않았습니다. 재료인 나무와 만드는 나, 내가 만드는 동물까지 다 연결된 것처럼 느껴졌어요. 그리고 이제 그것을 관람객들이 봐주시고, 또 어떤 분이 그 조각을 데려간다면 또 다른 연결이 일어나는 것이겠지요. 눈에 보이지 않는 실의 이쪽 끝과 저쪽 끝을 나눠 받은 기분으로, 나와 이어진 어떠한 존재가 있다는 믿음을 가져봐도 좋을 것 같아요. 눈을 감은 동물들 곁에서 잠시나마 안온할 수 있었다면, 그보다 큰 기쁨은 없을 것 같습니다. Q. 어느덧 한 해가 저물고 새해가 밝았습니다. 올해 새롭게 계획하신 바가 있다면 들려주세요.A. 지난 한 해는 거의 작업에만 몰두하면서 지냈는데 그러다 보니 놓치는 것이 많았어요. 올해는 더 조화롭게 시간을 나눠 쓰고 좋아하는 일들을 더 많이 하자고 결심했습니다. 조각가 권진규는 하루를 아침, 오전, 오후, 밤으로 나눠 작업하며 수행자처럼 살았다고 하는데요, 저는 아침, 오전, 오후, 밤을 나눠 아침과 밤은 온전히 나를 채우는 데 쓰고 오전과 오후를 작업하며 살고 싶어요(그럴 수 있을까요!). 개인적으로는 올해는 꼭 몇 년간 바라왔던 피아노를 배우고, 소소한 취미생활인 아침 산행과 탐조 활동을 더 적극적으로 하고, 음악을 더 많이 듣고 싶습니다. 작업적으로는 하반기에 유목 조각을 선보일 전시가 예정되어 있어요. 이번 핸들위드케어 전시에서 선보인 월 행잉 작품들도 더 다양하게 해나가려 합니다. 또 다른 기회로 만나 뵐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우연友緣의 벽 - 이수빈 작품전》은 2023년 1월 29일까지 한남동 handle with care에서 진행됩니다.☞ 전시 소개 자세히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