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하고 말리고, 갈아내고 덧칠하길 수백 차례. 인고의 시간 끝에 비로소 맑게 빛나는 칠예로 20여 년간 성실하게 자신의 세계를 일궈온 박수이 작가와 긴 대화를 나누어보았습니다. 계절의 아름다운 풍광을 담은 작업 이야기와 오랜 시간 차근히 걸어온 그간의 여정을 여기 소개합니다. Q. 안녕하세요. 처음 인사드립니다. 먼저 간단히 소개 부탁드려요.A. 옻칠과 목선반 작업을 하는 공예가 박수이입니다. 브랜드 수이57 아틀리에를 운영하며 다양한 옻칠 작업을 소개하고 있어요. Q. 공예적 요소를 접목한 옻칠화 시리즈가 인상적이에요. 회화로 작업의 영역을 새롭게 확장하게 된 계기가 있나요?A. 옻칠화 〈밭 시리즈〉는 칠예 작업과 ‘밭 일구기’에 관한 단상에서 시작되었어요. 칠 작업 행위 자체가 매일 만들고, 칠하고, 가는 일의 반복으로 이루어지다 보니 밭을 일구는 농부의 일과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화판에 결을 낼 때도 작은 땅을 일구는 마음으로 시작합니다. 옻과 부드러운 흙, 물을 섞어 쓱쓱 바르면 표면이 금세 양지의 얼굴을 띄어요. 그후엔 색칠한 조각이나 자개를 파편화하여 땅속에 씨를 뿌리듯 나열한 뒤, 칠로 덮고 토닥이며 마감합니다. 씨앗이 단단한 껍질에서 나와 각자의 빛 조각을 하나둘 찾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작업했어요. 크고 작은 밭을 소망하는 이들에게 저의 밭을 내어주고 싶다는 바람이 담긴 시리즈이기도 하고요. Q. 칠예에 본격적으로 입문하게 된 배경이 궁금합니다.A. 어릴 때부터 그리고 만드는 일을 좋아했어요. 칭찬을 자주 받으니 어렴풋이 나는 화가가 되려나 보다 생각했고, 자연스럽게 미술을 공부하게 되었습니다. 옻칠은 대학을 공예과로 진학하면서부터 배우기 시작했어요. 보통은 도자, 금속, 섬유, 목공으로 나뉘어 재료를 접하게 될 텐데, 우리 학교에선 좀 유별나게도 옻칠을 배우게 된 게 특별하면서도 신기하지 않은 계기랄까요. 그렇게 칠을 접하고 대학원에서 목칠공예를 공부한 뒤 본격적으로 작업을 시작했습니다. Q. 작업의 영감은 주로 어디에서 얻으시나요?A. 주로 자연에서 영감을 얻습니다. 작은 돌이나 결 고운 나무, 깊은 바다, 하늘의 푸른색 등을 마음에 담아요. 자연의 심상을 잘 표현하기 위해 생칠, 삼베, 찹쌀 등 대부분 천연 재료를 이용해 작업합니다. 나무나 삼베에 오랜 시간 옻을 정성스럽게 칠하고, 건조하기를 반복해 완성된 기물은 특유의 자연스러운 색과 깊이를 지니고 있어요. Q. 작업 과정을 자세히 들려주실 수 있나요?A. 먼저 바탕이 되는 백골을 만들고 칠해서 말립니다. 그 위를 삼베 등으로 감싼 뒤 찹쌀과 옻칠을 섞은 풀을 발라 건조해요. 마르고 나면 표면을 다듬고 칠합니다. 이때 생기는 틈은 흙과 물, 옻칠을 반죽한 것으로 메우고, 말린 후에는 표면을 갈아냅니다. 그다음은 또다시 칠하고 말리는 작업의 반복이에요. 모든 과정의 사이사이에는 온도와 습도 등 주변 환경 요소를 빈틈없이 준비하고 확인해야 합니다.이러한 과정이 마무리되면 뒤틀림 없는 형태가 되는데, 그다음부터는 작업자의 의도를 조금씩 더해요. 보통은 칠을 여러 차례 하며 갈고 말리기를 반복해 단단한 표면을 만들고, 자개나 금박으로 장식한 뒤 광을 내어 마무리합니다. Q. 옻칠 그릇과 식기, 모빌, 옻칠화에 이르기까지 작품의 스펙트럼도 다양한데요. 오랜 호흡으로 옻칠 작업을 이어오신 원동력이 무엇일지 궁금합니다.A. 정확한 답을 내리기는 힘들지만, 살면서 가장 오랜 시간을 공들여 이해하려고 노력한 대상이 칠이기 때문이 아닐까 싶어요. 재료나 형태적인 측면에서도 자기만의 기법을 개발해 표현할 수 있다는 점에 큰 매력을 느끼기도 했고요. 지금까지도 어렵고 괴로운 순간이 많지만, 작업자로서는 칠예의 다양성이 늘 새로운 연구 대상으로 다가오기 때문에 계속 작업을 이어나갈 수 있는 것 같아요. Q. 핸들위드케어에서의 첫 전시를 맞아 관람객 분들에게 전하고 싶은 메시지가 있다면 부탁드려요.A. 이번 전시는 크게 세 가지 작업에 집중했습니다. 크고 작은 밭이 담긴 옻칠화, 돌담에 둘러싸인 밭을 떠올리며 만든 바구니, 밭을 일구다 건진 돌로 쌓은 모빌인데요. 그 안에서 천천히 빛과 바람, 공기를 느끼고 움트는 씨앗을 들여다 보며 각자의 밭에 작은 소망을 하나씩 심어주시면 좋겠습니다. Q. 앞으로의 작업 계획을 알려주세요,A. 사실 이번 전시를 앞두고 계획이 많았는데 아쉬움이 남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조금 느리게 밭 사이를 둘러 가도 좋겠다 싶었어요. 다음 전시에서는 더 큰 밭을 만들어 많은 분이 쉬어가실 수 있도록 형태나 쓰임도 다양해졌으면 합니다. 또 앞으로는 서울과 제주에 오가며 작업할 수 있도록 준비 중이에요. 무엇보다 제주의 흙이나 자연적 재료를 작업에 접목해보고 싶습니다. 하반기에는 해외 브랜드의 인테리어 벽면에 새로운 결의 옻칠 작업을 할 예정이고, 옻칠 수업도 계획하고 있어요. 《칠흑결경漆黑潔景 - 박수이 칠예전》은 2023년 5월 28일까지 한남동 handle with care에서 진행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