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명주―로부터〕전시 이후, 명주의 결을 조금 더 깊이 보고 싶다는 소망은 정현지 작가와의 인연으로 이어졌습니다. 이후 함창 ― 서울 ― 에인트호번으로 전해진 명주는 규방 공예를 현대적으로 해석한 작품이 되어 서울로 돌아왔습니다. 작품과 전시에 대한 그림을 구체화하며 안부를 주고받았지만, 저희도 무척이나 궁금했던 그간의 작업 과정과 작품에 대한 더욱 자세한 이야기를 들어보았어요. 코로나와 거리의 장벽으로 인해 직접 만나 이야기를 나눌 수 없는 아쉬움을 달래며, 여기 그 이야기의 일부를 나눕니다. Q. 이번 전시 작품을 어떻게 기획했나요?A. 전시의 시작점이 된 이름이 ‘로부터(ROBUTER)’라서 “평면으로부터 입체까지”를 주제로 삼았어요. 명주라는 재료를 대하는 태도와 만드는 방식을 고민했고, 명주라는 평면 재료를 입체적으로 해석하는데 주안점을 두었어요. 그 첫 번째 방법으로는 평면재료에 입체적이거나 공간적인 이미지를 포개어 보았고, 다음으로 여러 겹의 두께를 줘서 그에 따른 재료의 밀도 변화를 살펴보았어요. 명주가 지닌 반투명함 덕에 겹침 사이에 공간이 생기고, 깊이에 따른 다양한 톤을 만들어주는 것 같아서 그런 면을 잘 활용하려 했습니다. Q. 명주가 다른 페브릭에 비해 다루기 까다롭지 않나요?A. 재료를 보고 만지고 느끼는 과정이 즐거워 잘 하고 싶다는 마음이 계속 생겨났어요. 특히 ‘투박이’의 거칠면서도 불규칙한 독특한 질감이 매력적이에요. 올의 굵기가 다양하게 나와서 명주 자체의 은은한 광택이 햇빛을 만날 때 또 다른 매력을 보여주거든요. 작업하기 까다로운 재료이지만 꾸준히 연구하고 연습해 기술적인 면을 발전시키고 싶은 욕심이 나게 하는 재료이기도 합니다. Q. 이번에 새로운 시도를 하신 건가요?A. 프로젝트 시작하기 전에 허호 선생님 인터뷰를 여러 번 보았었는데 이런 말씀을 하시더라고요. “옛 것을 그대로 두면 박물관에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오랜 시간 한 가지를 해온 장인인 허호 선생님마저도 옛 것을 그대로 답습하지 않고 시대의 변화를 인지해 항상 새로운 것을 시도하시려는 모습에서 큰 감동을 받았고 자극이 됐어요. 여러 겹을 겹치거나 평면에 입체감을 주는 시도는 제가 기존에 해오던 작업은 아니었어요. 하지만 ‘뭔가 자그마한 것 하나라도 새로운 것을 시도해봐야지. 나도 조금이라도 다른 방법을 모색해야지’ 싶은 마음이 든 것이죠. 허호 선생님이 제게 새로운 방향성을 제기해주신 셈이에요. Q. 저희도 허호 선생님의 그런 모습에 반해서 이 프로젝트를 해보자고 졸랐던 건데, 작가님이 지금 또 저희가 감동을 받았던 그 부분을 너무 잘 캐치해 이해해 주시고, 해석해서 또 너무 새롭게 잘 작업해주셔서 정말 감사해요.A.함창은 가본적은 없지만, 허호 선생님 뵈러 꼭 한번 가보고 싶어요. Q. 평면에 입체를 적용한다는 발상이 새로운 데요.A.병풍 속 풍경화나 민속화 중에는 입체적인 사물을 평면적으로 표현한 것들이 많아요. 이런 표현 방법이 재밌게 느껴져 이번 작업에 적용시켜보고 싶었어요. 집이나 골목길 같은 요소는 제가 늘 좋아하고 재밌어 하는 주제이기도 하고요. 사람한테 집은 중요한 공간이잖아요. 제가가죽으로 한 작업 중에 ‘이동하는 집’ 이라는 작품이 있어요. 돌아갈 한국의 집에 대한 그리움같은 마음이 저도 모르게 담긴 것 같아요. Q.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 적지 않은 것 같습니다.A.개인적으로는 네덜란드에 온 이후로 보자기 작업이 외로움을 달래주는 작업이기도 했어요. 가족과 친구들이 그립고 혼자 있는 시간이 많다 보니 보자기 작업을 하면서 마음의 안식을 삼았던 것 같아요. 하다 보니 이제 보자기가 저만의 디자인 언어를 전달하는 매개가 되어 가고 있어요. Q. 예전 작품 중 검은 직육면체 도형을 도안으로 한 조각보 작업(‘검은 벽돌’ 시리즈)이 인상적입니다.A.보자기의 전통적인 이미지도 좋지만, 거기에 그치지 않고 보자기를 통해 저만의 이야기와 디자인 언어를 전달하고 싶었어요. 평면과 입체의 관계를 표현하는 것이 제 작업의 주제였기에 일단 가장 기본적인 도형부터 표현해본 것이죠. Q. 스위스 로잔 예술대학(ECAL)에서 ‘럭셔리 앤 크래프트맨십’ 과정을 마쳤는데, 어떤 작업을 주로 하셨나요?A.커리큘럼 자체가 독특해요. 대부분의 교육 과정이 브랜드와 콜라보레이션으로 이뤄져 있어요. 모비엘(Mauviel), 에르메스(Hermes), 바쉐론콘스탄틴(Vacheron constantin) 같은 럭셔리 브랜드들과 크래프트맨십이라는 주제로 브랜드 장인과 학생들이 협업해 작품을 만들어요. 간혹 선택된 작품은 출시되기도 합니다. Q. 작가님 작품은 에르메스에서 출시되었죠?A.에르메스 중에 쁘띠 아쉬(Petit H)라는 브랜드가 있어요. 에르메스에서 사용하고 남은 재료, 잘못 인쇄됐거나 아쉬운 점이 있는 제품들을 활용해 새로운 제품으로 재탄생 시키는 브랜드입니다. 프로젝트 자체가 어린 아이의 상상력을 요하는 프로젝트인데요, 저는 가죽 테슬이 달린 연필꽂이가 되는 팽이를 만들었어요. 연필을 꽂아 팽이를 돌리면 가죽 테슬이 치마처럼 확 퍼지는 거죠. 그래서 작품 이름이 ‘Petit dancer on the table(탁자 위의 작은 댄서)’이예요. 이게 선택돼 출시됐어요. 한국의 에르메스에서도 전시됐었죠. Q. 작업의 영감은 주로 어디서 얻으시나요?A.평범한 일상에서 주로 얻어요. 길을 걷다 마주치는 것들을 관찰하죠. 건물의 구조, 건물의 기둥과 면이 어떻게 만나는지, 벽돌의 짜임, 타일의 패턴, 창문의 구조 같은 것들이요. 이런 구조적인 피사체들이 평면과 만나는 패턴을 유심히 보고 사진으로 남겨둡니다. 프로젝트를 할 때 스케치를 많이 하는데, 스케치한 것들을 요소별로 다양하게 조합하면서 반복적으로 스케치하면서 발전시켜요. Q. 지금 살고 있는 네덜란드 에인트호번은 어떤 곳인가요?A.아주 작은 도시예요. 자전거를 타고 도시의 끝에서 끝까지 30~40분이면 갈 수 있죠. 작은 도시이지만 디자인 학교들은 물론 한국의 카이스트 같은 과학기술전문 대학들이 모여 있어요.첨단 지식과 크리에이티브의 중심이라고 하더군요. 개인적으로는 소규모 스튜디오들도 많고크리에이터 동료들이 많은 점이 좋아요. Q. 궁극적으로 표현하고 싶은 것, 목표 같은 것이 있나요?A.아직 최종 목표 같은 것이 구체적이거나 뚜렷하지는 않아요. 제가 지금 갖고 있는 느낌과 생각을 꾸준히 표현해 가다 보면 주제나 소재도 조금씩 변화할 테고, 이렇게 시간이 쌓이면 ‘내가 궁극적으로 표현하고자 하는 것들이 이런 것이었구나’하는 순간이 오지 않을까요. 지금은 현재의 관심을 충실히 표현하고 싶어요. 할머니가 될 때까지 오래오래 지금과 같은 하루를 반복 하는 것이 제가 하고 싶은 일인 것 같아요. 정현지 작가의 이번 함창명주 작품 시리즈는 한남동의 Handle with Care에서 만나보실 수 있습니다. 명주의 결과 아름다움을 더욱 깊이 느껴보실 수 있는 자리가 되시길 기원합니다. ※ 본 인터뷰는 지역으로부터 가치 있는 물건과 이야기를 전하는 ROBUTER에서 진행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