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선 곳에서 어려움과 부침보다는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고 친밀해지는 과정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습니다." 청명한 가을 하늘을 기다리던 8월의 끝자락, 듀오 작품전 《Clay of Elsewhere》를 앞두고 허이서 작가와 전시에 관한 이야기를 주고받았습니다. 미국으로 이주한 뒤 마주한 낯섦을 받아들이는 태도에서 출발해, 이를 새로운 조형적 언어와 방식으로 확장해 온 과정까지, 허이서 작가의 진솔한 이야기를 여기 나누어봅니다. Q. 안녕하세요, 작가님. 핸들위드케어 전시를 통해 처음 인사드립니다. 먼저 작가님의 소개를 부탁드려요.A. 안녕하세요, 허이서입니다. 한국에서 도자기 만들다 2년 반 전 미국으로 이주해 작업을 새롭게 이어 나가고 있습니다. 오랜만에 한국에서 핸들위드케어를 통해 작품을 보여드리게 되었어요. 만나서 반갑습니다! Q. 현재 미국 메릴랜드에 거주하며 도예 작업을 하고 계시지요. 작업실에서의 하루는 어떻게 흘러가나요? 한국에서 삶과 비교했을 때 작업 루틴에 다른 점이 있다면 무엇인지 궁금합니다.A. 한국에서는 공유 작업실에서 늘 친구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면서 작업을 했어요. 하지만 미국에서는 집에서 혼자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협소하지만 하나의 홈 스튜디오라고 생각해 주시면 될 것 같아요. 매일 재택근무를 하는 기분이에요. 보통 오전에는 남편과 티타임을 갖고, 집안일하고, 키우는 반려동물들과 함께 시간을 보냅니다. 정오쯤 작업을 시작해 저녁 8시에는 마무리하려고 해요. 집에서 작업하다 보면 나태해지기 쉬워서 직장인처럼 최소 주 40시간은 작업을 하려고 노력합니다. 하지만 중간중간 식사도 준비하고 강아지와 산책도 하고 낮잠도 자고 책도 읽고 시간을 유연하게 쓰다 보니 대부분은 더 늦게까지 작업을 하게 되네요. 한국과 달리 공간에서 일과 생활의 경계가 분명하지 않고 혼자서 작업을 하다 보니 작업에 집중력을 유지하기가 이전보다는 어렵긴 해요. 하지만 그만큼 제 생활을 더 잘 돌볼 수 있는 것 같아요. 서울에서는 작업에만 몰두하다 일상에서 될 많은 걸 놓치거나 놓아버리기도 했거든요. Q. 한국에서 도자 공예 석사와 학사 과정을 마치신 뒤, 미국으로 이주해 작업을 이어오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요?A. 20대 학부 시절부터 도예 작업을 해오면서 자연스럽게 작가의 삶을 시작했습니다. 운이 좋게도 석사 과정을 마치기 전부터 제 작업에 대한 반응이 조금씩 생겨 몇 번의 전시를 하고, 많진 않았지만 꾸준히 판매도 이어가며 작가 활동을 지속할 순 있었어요.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관성적으로 작업을 하고 있다는 기분을 지울 수 없었어요. 매일 새로운 것들이 쏟아지는 공예의 붐 속에 뒤처지지 않으려 애쓰다 보니, 중심을 잡는 것도 어렵고 점점 힘에 부치기도 했습니다. 그러던 중 결혼을 계기로 미국에 갈 기회가 생겼을 때, 잠시 작업을 쉬어볼까 하는 마음으로 이주를 선택하게 되었어요. 30대라는 새로운 챕터를 시작하면서 제 작업과 커리어를 돌아볼 시간이 필요했고, 안전지대를 벗어나 이전과 다른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볼 기회가 왔는데 그걸 놓치면 후회할 것 같았거든요. Q. 이번 전시에서는 정형화된 구조를 넘어 보다 다양한 조형적 접근을 시도한 작품을 선보입니다. 구체적으로 어떤 작품을 만나볼 수 있을지, 인상 깊었던 작업 과정과 함께 전시작에 담긴 이야기를 소개해 주세요.A. 이번 전시는 지난 2년 반의 시간을 처음으로 사람들과 나누는 자리입니다. 낯선 곳에서의 어려움과 부침보다는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고 친밀해지는 과정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어요. 그래서 조형적인 접근을 통해 미국 생활 속에서 즐거웠던 에피소드를 더욱 구체적으로 전달하는 데에 중점을 두었습니다. <덤불새>는 반려견과 집 주변을 산책하던 중 덤불 속에서 쉬고 있던 새들을 발견하면서 시작된 작업이에요. 매일 지나치는 큰 덤불이었는데, 그 안에 있는 새들의 존재를 알게 됐을 때 비로소 이곳과 진짜로 가까워진 기분이 들었거든요. 단순히 눈에 보이는 것을 넘어, 그 너머의 존재를 인식하게 될 때 느끼는 친밀함에 관한 작업입니다. <Dappled>는 '얼룩덜룩한' 또는 '아롱거리는'이라는 뜻의 형용사로, 햇빛을 피해 나무 그림자 아래 쉬어가던 시간을 표현한 작품이에요. 알레르기가 있어서 여름마다 햇빛을 견디는 일이 힘든데 미국은 심지어 자외선이 더 강하거든요. 다행히도 건조한 기후 덕분에 나무 밑에서 햇빛만 피할 수 있다면 금세 시원해져 야외 활동을 할 때 큰 도움이 돼요. 그래서 거대한 나무들은 저에게 정말 소중한 존재랍니다. 이곳의 나무를 표현해야겠다 했을 땐, 나무의 종류와 모양이나 가지의 각도 같은 외형적인 것들보다는 나무가 드리운 커다란 그림자와 잎사귀 사이로 스며드는 빛에 대해 말하고 싶었어요. 그 빛이 작열하던 햇빛마저 부드럽게 조각내주는 나무의 안락함을 보여준다고 생각했거든요. Q. 이번 전시의 타이틀은 《Clay of Elsewhere》입니다. 미국의 흙, 유약, 가마 환경 등 그곳만의 조건 속에서 만들어진 작업은 어떤 특징과 매력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또한 한국과는 다른 환경과 재료의 변화가 작업 과정과 결과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도 궁금합니다.A. 흙과 유약, 즉 재료는 형태와 기법을 떠나 도자기에서 가장 중요하고 흥미로운 부분이라고 생각해요. 처음에는 낯선 재료를 이해하는 과정이 쉽지 않아 시간이 오래 걸렸지만, 미국의 재료를 사용하고 여러 방식으로 실험해 보는 과정 자체는 정말 즐거웠어요. 특히 개인적으로는 미국 소지의 종류가 한국에 비해 다양하고 하나의 소지가 여러 목적에 쓰이기 좋다고 느꼈어요. 이는 여러 기법을 한 번에 활용할 수 있다는 뜻이어서 훨씬 자유롭게 형태를 만들어낼 수 있었습니다. 또 가소성, 백색도, 입자의 조밀함 같은 요소의 밸런스가 좋은 흙들이 많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절개와 접합을 반복하는 복잡한 과정의 작업을 하기에도 수월하고요. 지금 하고 있는 작업 가운데 예전에 제가 사용했던 한국의 흙으로는 구현하기 까다로웠을 것들도 많아요. 물론 밸런스가 한쪽으로 치우쳐 있어도 사용하는 기법에 알맞다면 크게 문제는 없지만, 저는 핸드 빌딩부터 슬립 캐스팅, 판 성형과 물레, 부조 작업까지 다양한 기법을 함께 사용해 작업을 하는 편이라 한국에서는 기법마다 다른 흙을 써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었거든요. 아직은 미국의 흙을 탐구해 가는 입장이기에 앞으로 시도해 볼 흙이 많이 남았지만, 이번 작업에서 쓴 흙들 모두 어떻게 보면 제가 항상 원하던 방향과 가까운 것들이었어요. 그레서 처음 이 흙들을 마주했을 때 굉장히 기뻤던 기억이 있습니다. Q. 작가님의 그릇 작업을 보면 꽃잎 같기도, 구름 같기도 한 독특한 실루엣이 눈에 띕니다. 서로 다른 크기의 원형이 이어 붙이는 단순한 행위를 통해 예상치 못한 형태와 구조를 찾아 나가는 과정이 흥미롭다고 말씀하셨는데요. 이러한 작업 방식의 출발점이 된 모티프가 있을까요?A. ‘찌그러져도 동그라미입니다’라는 문구는 가수 김창완 님의 에세이 제목이기도 하고, 김창완 님이 진행하던 라디오에서 직장 생활에 지친 청취자의 사연에 건넨 답변이기도 합니다. 손으로 그린 47개의 동그라미 중 단 두 개만 그럴듯하다는 이야기처럼, 세상살이가 자로 잰 듯 딱 떨어지지 않으니 매일에 집착하지 말고 여유를 가지라는 위로였어요. 그 글과 함께 한동안 인터넷을 떠돌던 동그라미가 가득 그려진 이미지가 제게도 큰 인상을 남겼습니다. 그리고 미국에서 다시 작업을 시작할 무렵, 낯선 환경과 의무의 부재 속에서 어떻게 작업을 해야 할지 감각을 잃어버린 상태였는데 문득 그 이미지가 생각나더라고요. 미국에 온 선택을 증명해야 한다는 부담감까지 겹치면서 선뜻 무언가를 시도조차 못 하고 있는 저에게 감사한 위로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동그라미를 그려보는 것부터 시작했어요. 그걸 겹치고 크기랑 형태를 마음껏 바꾸다 보니 비로소 무언가가 시작되는 기분이 들었고, 늘 해보고 싶었지만 잘 할 자신이 없어 머뭇거리던 기 작업까지 이어지게 되었습니다. Q. 손 글씨로 작업 노트를 남기며 영감과 감상을 꾸준히 기록해 오시는 모습이 인상적입니다. 작가님의 기록은 단순한 메모가 아닌 작업 세계를 확장하는 하나의 방식처럼 느껴지기도 해요. 작가님에게 기록은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나요?A. 말한 대로 이루어진다는 말 대신, 기록하는 대로 이루어진다고 생각해요. 과거의 끄적임을 지금에 와서 읽어보면 현재와 닮아있는 경우가 많아서 놀라곤 합니다. 2023년, 한국을 떠나올 때 사용했던 노트에 ‘2025년에는 다시 전시를 할 것’이라고 써놨더라고요. 또 다른 노트 한쪽에는 세잔의 그림을 본 뒤 그의 그림처럼 익숙하면서도 낯선 느낌을 주는, 무언가 명확하지 않아도 좋은 작업을 하고 싶다고 남겨두었는데 그 글들이 최근 제 작품의 형태나 시유 방식에 영향을 준 것 같아요. 결국 무언가를 기록한다는 건 의식적으로 무언가를 꼭 해내겠다는 다짐이라기보다, 영감이든 감상이든 그 모습을 유심히 보고, 깊이 생각하고, 글로 남기는 수고를 기꺼이 할 만큼 애정에서 비롯되는 행위라고 생각해요. 그런 애정은 쉽게 사라지지 않고, 계속해서 제 작업에 영향을 미칠 거라고 믿고 있고요. Q. 이방인으로서 마주한 불확실성과 모호함을 받아들이는 태도가 현재 작업의 중요한 방향이 되었다고 이야기해 주셨어요. 한편으로는 시간이 지나 미국 생활에 더 익숙해지고 안정기에 접어든다면, 지금의 낯섦은 차차 옅어져갈 텐데요. 그런 변화가 앞으로의 작업에는 어떤 영향을 미치게 될까요?A. 미국에서의 시간이 하루하루 흐를수록 낯섦이 옅어지긴 해도, 난 영원히 이방인으로 살겠다는 생각은 짙어져요. 많은 것들이 익숙해져도 떠나왔다는 사실만큼은 변하지 않으니까요.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슬프지는 않아요. 오히려 제 정체성은 그 지점에서 오는 것 같고, 이방인의 삶을 함께 시작한 가족이 있기에 지금의 삶에는 행복이 더 많거든요. 물론 앞으로도 변화가 없을 것 같다는 뜻은 아니에요. 떠났기에 할 수 있는 일들이 있으니까요. 예전의 저라면 하지 않았을 것들을 찾아 볼 생각이에요. 이번 전시에서 도판 작업에 부조를 시도 해본 것처럼요. 나다움에 집착하면서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에 대한 제한을 많이 뒀었는데 그런 것들을 버릴 준비가 된 것 같습니다. Q. 전시를 찾는 분들께 전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면 부탁드립니다.A. 1년 가까운 시간 동안 이번 전시를 준비하며 작품을 통해 많은 이야기를 담아낼 수 있었습니다. 지난 2년 반은 새로운 곳에 적응하기 위해 격렬히 지내다 보니, 매일매일 생각이 바뀌기도 하고 스스로 무슨 생각을 하는지조차 알아기 어려울 때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제 이야기가 두서없이 전달될까 살짝 우려가 되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조금 더 시간을 들여 바라봐 주시고 오래도록 기억해 주시면 좋겠어요. 또 많은 이야기를 가지고 돌아올게요! 박민희&허이서 작품전 《Clay of Elsewhere》는 2025년 9월 5일부터 9월 21일까지, 녹사평 티더블유엘 4층 handle with care 에서 진행됩니다. Editor 오송현Photo 이승아, 허이서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