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미혜 작가의 월광문반을 바라보고 있으면, 이 작업이 받아온 사랑의 무게가 얼마나 타당한지에 대해 생각하게 됩니다. 많은 이들이 열정적으로 손꼽아 기다리는 작품이지만, 그만큼의 애정과 노고가 이루 말할 수 없이 쌓여 있다는 사실을 알고 나면 '이 정도의 사랑은 지극히 당연하다'라는 마음이 들어요. 핸들위드케어에서 세 번째 전시를 앞둔 남미혜 작가와 전시에 관한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다시 한번 그 사랑의 무게에 고개를 끄덕이게 되었습니다. 작가가 아로새긴 고요의 형태를 닮은 편안했던 대화를 여기 나누어 봅니다. Q. 안녕하세요, 작가님. 핸들위드케어와의 세 번째 전시로 다시 인사드리게 되어 반갑습니다. 2022년 12월 《무늬예찬》 전시 이후 꽤 시간이 흘렀는데요. 그동안 어떻게 지내셨나요?A. 질문을 받고 바로 휴대폰 사진첩부터 열어보았습니다. 몹시 분주했다는 것만 생각나고 구체적으로 떠오르는 장면이 없어서 잠시 당황했어요. 어디 보자… 《무늬예찬》을 계기로 문양을 다루는 전시에 몇 차례 참여했네요. 원고로 참여한 단행본이 발행됐고, 브랜딩팀으로 참여했던 공간이 오픈했어요. 학생들을 대하는 시간이 많아졌는데 그만큼 책임감도 커져서 틈만 나면 도서관에 가서 공부하고 있었고요. 이번 전시를 준비하기 시작했던 작년 10월부터는 머릿속에 ‘무사히 완성’ 다섯 글자 말고는 없었던 것 같아요. Q. 지난 인터뷰에서 “하나라도 허투루 했다가는 큰일이 난다는 생각으로 작업에 임한다”라고 말씀해 주셨던 게 기억나네요. 여전히 같은 마음으로 작업하고 계신지, 요즘 작업실에서 일과는 어떻게 흘러가는지 궁금합니다. 또 이런 꼼꼼함이 작업 외의 일상에서도 자연스럽게 드러나는지도 여쭤보고 싶어요. A. 재료도 과정도 여전히 모르는 것투성이입니다. 게다가 예민한 도구로 더 예민한 재료를 다루다 보니 어떻게든 안심하려면 온 신경을 곤두세우고 집중하는 것밖에 방법이 없어요. 집중하기 시작하면 주변이 잘 안 보이는 편이라 몇 시간이고 미동도 없이 바위처럼 앉아 있을 때가 많습니다. 작업하는 동안에는 가지고 있는 모든 감각이 뾰족하게 날이 서 있는 느낌입니다. 신경 쓰이고 거슬리는 것도 많아져요. 매사에 긴장도가 높아 금세 지쳐버릴 때면 평소보다 더 정성을 들여 요리하고는 해요. 재료를 다듬고 썰고 예쁜 그릇에 담고 하다 보면 여러모로 긴장이 풀립니다. 산에 가야 제대로 충전이 되는데 올해는 바빠서 한 번도 제대로 못 갔어요. 계절마다 가장 예쁜 건 산에 다 있거든요. 일할 때 말고는 꼼꼼함과 거리가 먼 성격이에요. 물건도 자주 잃어버리고 휴대폰도 수시로 떨어뜨리고.(웃음) Q. 전시 제목인 《고요의 형태》는 작업에서 위안의 존재로 사용해 오던 ‘달’의 이미지를 출발점으로, 그 위안의 감각을 달 너머의 다른 형태로 확장해 보고자 하는 의미에서 비롯되었어요. 이번 전시를 통해 전하고 싶었던 이야기에 대해 자세히 말씀 나눠 주세요.A. 월광문반이라는 작업 덕분에 오랜 시간 가지고 살던 통제 강박을 많이 고쳤습니다. 계획대로 되는 게 하나도 없거든요.(웃음) 어렵게 완성한 작업이 예상한 것 이상으로 많은 분들께 사랑받게 되면서 내가 세운 가설이 틀리지 않았다는 생각에 기쁘면서도 한동안 혼란스러운 시기를 보냈습니다. 지금도 작가라는 호칭이 어색 한데, 당시에는 “저 작가 아닌데요?” 하고 부정할 정도였어요. 여러모로 준비가 되기도 전에 주문이 밀려 들기 시작해, 계획했던 일을 모두 접어두고 일단 밤을 새워 완성해야 했습니다. 그러던 중에 일종의 번아웃이 왔던 것 같아요. 같은 일을 반복하는 데서 오는 불안도 있었고요. 연구자로서 하나의 결론을 내렸으니 어서 다음 주제로 옮겨가야 하는데, ‘나 지금 뭐 하고 있는 거지?’ 하는 생각에 피로가 쌓여가던 때였습니다.그럴 무렵 프로덕트 디자이너 후카사와 나오토 Naoto Fukasawa 선생님을 서울에서 만났어요. 근황을 이야기하다가 요즘 이런 걸 만들고 있다고 월광문반을 선물로 드렸는데, 손에 들고 가만히 바라보시더니 “그렇지, 오래전부터 사람들에게 달은 평면이었지.” 하고 나지막이 말씀하시는 거예요. 순간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었어요. 어떤 마음으로, 왜 이 작업을 시작했는지를 힘들다는 이유로 감쪽같이 잊고 있었다는 걸 깨달은 거죠. 달은 오랫동안 ‘바라보는’ 대상이 되어 왔습니다. 긴 세월을 거쳐 수많은 사람들을 안심시키고, 소원을 들어주고, 어두운 밤길을 안내해 주는, 무엇보다 듬직한 존재였어요. 늘 약속한 시각에 하늘 위로 떠오르고 모양을 바꿔가며 시기를 알려주기도 하고요. 지구 주위를 도는 위성이기 전에 늘 같은 자리에서 우리를 지켜봐 주는 동그랗고 밝게 빛나는 평면. 그런 존재의 이름을 감히 빌려와 놓고는 힘들다고 징징대기만 했던 게 어찌나 부끄럽던지. 그날을 계기로 작업에 대한 마음가짐은 물론이고 많은 것이 달라졌습니다. 주문을 따로 받지 않기로 하고 속도도, 수량도 최소한으로 줄였어요. 손으로는 정말 많은 것이 전달돼요. 손으로 하나하나 만드는 사람이 행복해야 완성된 물건도 비로소 사랑받을 수 있다는 걸 알게 됐어요. 그런데 같은 것을 반복해서 만드는 것에서 오는 불안은 잘 해결되지 않더군요. 그때 고요함에서 출발한 문양, ‘월광문’의 의미를 확장하는 것으로 스스로 만든 벽을 깰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Q. 이야기해주신 것처럼, 이번 작업에서는 ‘성당의 창문’이 달과 같은 의미를 담은 중요한 모티프로 등장합니다. 성당의 창문을 월광문반에 새기고자 했던 이유가 무엇인가요? 또한 성당과 관련한 기억 중 특히 선명하게 남아 있는 장면이 있다면 함께 들려주세요.A. 그동안 소재로 삼아 온 달의 형상 덕분에 월광문반이 많은 분들에게 보다 쉽게 다가갈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달에는 누구나가 공유하는 정서가 담겨 있어요. 그래서 디자인 면에서는 더 어렵기도 해요. 삼척동자도 서울에 사는 김 서방도 며느리도 매일 보는 ‘달’이잖아요.(웃음) 이번 전시를 준비하면서 달이 가진 여러 가지 의미 중에서도 ‘바라보는’ 대상, 늘 곁에서 ‘위안을 주는’ 존재를 중요한 주제로 삼고 스스로에게 계속해서 되물었어요. 나의 믿는 구석은 무엇일까. 무엇이 나를 평온하게 할까, 고요하게 할까. 어린 시절부터 사람이 많은 곳을 그리 좋아하지 않았어요. 그때도 지금만큼이나 예민했던 것 같아요. 주변이 소란스럽거나 고민이 생겨 마음속이 시끄러울 때면 도망치듯이 성당을 찾아갔어요. 두꺼운 벽으로 둘러싸인, 아무도 없는 성당 구석에 앉아 스테인드글라스 너머로 들어오는 색색의 빛을 보고 있으면 ‘안전하다’라는 느낌을 받습니다. 지금도 어느 동네에 가든지 근처 성당부터 찾아둬요. 미사가 없는 시간에 한참이고 앉아서 이런저런 생각을 정리하기도 하고, 사진이나 스케치로 그날의 창문을 수집합니다. 건축을 향한 호기심도 커요. 1960-70년대에 지어진 오래된 성당을 주로 찾아가는데 데이터가 쌓이다 보니 이제는 구조적 특징이나 디테일을 보면 누가 설계했는지 대충 알아볼 수 있게 됐어요. 어디를 가나 재개발이다 뭐다로 부수고 뒤집어엎기 바쁜 와중에 가만히 같은 자리를 지키고 있는 건물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큰 위로가 되죠. 꼭 성당일 필요는 없어요. 스스로 안전하다고 느끼는 공간 한쪽에 앉아 있다고 상상해 보세요. 풀숲에 바늘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릴 만큼 주위는 고요해요. 눈앞에 창문이 있고, 그 창문의 크기만큼의 빛이 가만히 나를 비추고 있어요. 그 순간 느끼는 감정을 그대로 작업에 옮겨 담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Q. 산들바람과 수평선 역시 달과 동일한 위안의 형상으로 사용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이 두 모티프에 담긴 감정과 기억은 어떤 것이었는지, 각각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A. 산들바람과 수평선은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정서를 고민하면서 시작된 모티프입니다. 기존의 달이 가지고 있는 보편적인 의미의 연장선으로 봤어요. 네모난 창문을 사선으로 채워 빛과 함께 바람을 담았습니다. 멀리서 불어오는 산들바람에 기분이 나빠지는 사람은 어디에도 없을 거예요. 잔잔하게 일렁이는 바다는 어떤가요. 끝도 없이 눈앞에 펼쳐진 풍경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다 보면 금방이라도 다 괜찮아질 것 같아요. 창문도 출발은 저의 개인적인 기억이겠지만, 결과물은 누구나 쉽게 공감할 수 있어야 했어요. 공감이라는 말에는 ‘이해’가 담겨있어요. 그 이해의 대상은 ‘서로’여야 하고요. ‘저의 이야기는 이러합니다, 당신은 어떤가요?’ 하는 마음 때문에 하나라도 더 작업하게 되는 것 같아요. 각자의 수많은 기억과 감정을 투영하기 위해서는 최대한 단순한 형태로 완성하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했어요. Q. 자개를 다루는 방식은 형태마다 조금씩 달라질 것 같습니다. 달빛을 표현할 때와는 달리, 창문, 산들바람, 수평선 같은 새로운 형태를 표현할 때 특별히 달라진 지점이나 새롭게 떠오른 고민이 있었다면 이야기해 주세요.A. 이번 전시를 준비하면서 일기장에 적어둔 문장이 있어요. ‘동그라미만 어려운 줄 알았더니 직선도 어렵다!’ Q. 이번 전시에는 기존보다 작은 크기의 월광문반이 눈에 띕니다. 보다 작은 크기를 시도하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요? 작업 과정에서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가 있다면 함께 들려주세요. A. 제가 필요해서요! 한 손에 쏙 들어오는 월광문반이 가지고 싶었어요. 만족할 만한 크기와 비율을 찾기까지 상당한 시간이 걸렸습니다. 1mm 차이로 작업의 인상이 정말 크게 달라지거든요. 샘플 작업만 대체 몇 번을 한 건지. 가능한 경우의 수는 모두 직접 만들어보고 검증하기를 반복했어요. 손 크기별로 주변 사람들을 모아 손에 들려도 보고, 어떻게 사용하는지도 살펴보고요. Q. SNS를 통해 CD, LP 사진과 함께 그에 대한 감상을 자주 공유하시는 모습을 보면서, 음악이야말로 작가님에게 진정한 ‘위안의 대상’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작가님에게 음악은 어떤 존재인지, 또 이번 작업을 준비하는 동안 어떤 음악을 즐겨 들으셨는지도 궁금하네요.A. 저에게 음악은 밥같은 거예요. 밥때가 되면 ‘뭐 먹지?’ 하듯이 늘 머릿속에 ‘뭐 듣지?’ 하는 생각이 있어요. 교복을 입던 시절부터 ‘오늘의 앨범’을 고르는 게 아침 일과였어요. 그날의 날씨, 기분, 앞두고 있는 중요한 일이나 계절마다 변하는 바람 냄새 같은 것들이 모두 ‘오늘의 앨범’ 선정 이유에 들어가요. 그렇게 가지고 나온 앨범이 그날이랑 기가 막히게 어울리면 좋고, 묘하게 어긋나면 그건 또 그것대로 웃겨서 좋아요. 일종의 라디오 디제이인 셈이에요. 근데 이제 청취자가 저 하나뿐인.(웃음) 음악은 수집의 대상이기도 합니다. 중학생 때부터 CD를 하나둘 모으기 시작했으니, 꽤 오래된 취미가 됐네요. 같은 규격으로 세계 각국 다양한 장르의 앨범 커버가 모여있는 걸 보는 게 좋아요. 곡 하나도 어려운데 여러 곡을 만들어서 제목을 붙이고 흐름을 생각해서 트랙 순서를 정하고 전체적인 테마에 맞춰 커버를 만들고… 앨범 한 장을 완성하기까지의 지난한 과정을 상상하다 보면 부클릿도 한 번 더 펼쳐보고 어떤 디테일이 숨어있는지 더 집중해서 듣게 됩니다. 예전에는 일기장에 날씨와 앨범 제목을 차곡차곡 적었는데, 세상이 참 좋아져서 사진으로 기록할 수 있으니 편해요. 이번 전시를 준비하면서 정말 많은 시대, 많은 장르의 앨범을 들었어요. 13개월 치의 ‘오늘의 앨범’이 쌓였을 텐데 그중에서도 특별히 자주 들은 게 있다면 올해 6월에 발매된 브라이언 이노 Brian Eno와 비티 울프 Beatie Wolfe의 합작 <Luminal>일 거예요. 특히 여섯 번째 트랙 <Suddenly>라는 곡은 언제 들어도 금세 마음에 사랑이 차올라요. 재즈 뮤지션 찰스 밍거스 Charles Mingus의 1956년 작 <Pithecanthropus Erectus>도 작업이 도통 풀리지 않는 새벽에 자주 들었고… 답답한 게 많았는지 한동안 레이지 어게인스트 더 머신 Rage Against The Machine의 앨범들만 밤낮으로 듣던 때도 있었네요.(웃음) Q. 입동에 들을 노래까지 미리 정해두셨다는 글도 인상적이었어요. 음악에 대한 애정뿐 아니라 절기를 꾸준히 챙기며 기록해 오시는 모습도 흥미로웠는데요. 절기를 의식하며 지내는 일은 작가님에게는 어떤 의미를 갖고 있나요?A. 이십사절기는 농경사회의 중요한 지침으로 기능해 왔습니다. 사람들은 오랫동안 이 절기들을 기준으로 씨앗을 심고, 김을 매고, 추수를 하면서 계절의 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대비하며 살아왔어요. 농사를 지어본 적 없는 저는 이십사절기에 대해 그렇게 상세히 알고 있지는 못합니다. 달력에 미리 체크해 두었다가 그날이 오면 왜 그런 이름이 붙었는지 한번 더 찾아보고, 그걸 핑계 삼아 하늘 한 번 더 보고 바람 냄새 한번 더 맡고 좋아하는 음악 이야기나 한 번 더 하는 거예요. 즐겨 듣는 노래에 이런 가사가 있어요. “변함없이 계절에 민감하고 싶어.” Q. 작가님의 월광문반을 기다리는 분들이 정말 많습니다. 이번 전시를 찾는 분들께 전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면 부탁드려요.A. 한동안 랜선을 타고 돌아다니던 사진이 있습니다. 제주 함덕 바닷가에 있는 안내 표지판을 촬영한 건데, 거기에 이렇게 적혀있어요. ‘돌고래 전망대 (한 달에 3번 지나감)’. 이걸 전망대라 불러도 되는 거냐고 사람들이 웃는데 저는 못 웃겠더라고요. 언제 입고될지 모르는 제 작업 같아서요. 기다려 주시는 분들께 늘 죄송한 마음이 있습니다. 조금이나마 보답하고 싶은 마음에 오랜 기간 준비했어요. 고요함을 찾아다니며 주워 담아 온 장면들을 녹사평 언덕배기 위에 모아 두겠습니다. 낙엽이 바삭한 계절이에요. 바람은 살짝 매콤하니 도톰한 복장이 좋겠어요. Q. 어느새 2025년을 마무리하는 시기입니다. 올해 소망하시던 것을 이루었는지, 그리고 내년에는 어떤 시간을 기대하고 계신지도 마지막으로 이야기 나눠주세요.A. 올해를 ‘무사히 완성’으로 보냈으니 이번 전시를 무사히 오픈하는 걸로 소망하던 걸 이룬 게 되겠네요. 내년에도 두서없이 분주하게 보낼 것 같아요. 조금씩 준비하기 시작한 일이 몇 가지 있는데 그중에는 마음이 맞는 친구와 함께하는 2인전도 있어요. 그동안 시도한 적 없는 내용이 될 거라 설레기도 하고 긴장도 되네요. 일단 산에 좀 다녀올게요.(웃음) 남미혜 작품전 《고요의 형태》는 2025년 11월 28일부터 12월 14일까지, 녹사평 티더블유엘 4층 handle with care 에서 진행됩니다. Editor 오송현Photo 이승아, 남미혜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