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주 콜렉션을 준비하며 이따금 어떤 얼굴들을 머릿속에 그려보곤 했습니다. 자신의 속도와 보폭으로 다양한 층위를 쌓으며 살아가는 우리 주변의 동료와 친구들입니다. 귀하고 소중한 날 지어 입은 명주 옷이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의 매일 매순간을 기념하는 조용한 후광이 되길 고대하며, 각자의 영역에서 활발히 활동하는 4명의 동시대 여성을 만나보았습니다. 명주로부터 시작된 그 이야기를 여기 함께 나눕니다. 《Layered on Layers》 Interview Series01. Studio Ohyukyoung 오유경 대표02. 두오모 허인 셰프03. 박선영 컬럼니스트&모더레이터&오거나이저04. 믹히 타투이스트 Studio Ohyukyoung의 오유경 대표님을 만나 명주와 함께한 지난 1년여간의 여정을 톺아보았습니다. 친숙하면서도 낯선 소재인 명주를 긴 시간 응시하며 느낀 소회와 고민, 앞으로의 기대를 들을 수 있는 소중한 자리였어요. 한 폭의 명주가 일상의 소중한 순간을 위한 옷으로 탄생하기까지의 과정을 함께 즐겨주세요. Q. 《Layered on Layers》 프로젝트에 참여하게 된 계기가 궁금합니다. 저희가 원단을 살 수 있는 곳이 대부분 동대문 시장이에요. 동대문 시장은 가격에 좌지우지되는 굉장히 상업적인 시장이죠. 다양성보다는 사업적인 게 우선시 되다보니 예전에는 동대문에 더 다양한 가게들이 많았던 거 같은데 지금은 꽤 없어진 거 같아 아쉬워요. 상황이 그렇다 보니 저희는 특별한 원단을 만날 기회가 잘 없어요. 또 이 원단을 어떻게 만들었는지, 누가 만들었는지 설명을 들을 수 있는 기회는 더더욱 없고요. 어떤 분들은 이런 경험을 한번도 해보지 못하고 디자이너 생활이 끝날 수도 있어요. 그런데 누가, 어떻게 만들었는지 내력을 알고 있는 원단을 사용할 수 있는 기회라 특별하게 느껴졌어요. 저는 이 프로젝트가 그래서 의미 있고 즐거워요. Q. 프로젝트를 시작할 때 함창에서 명주 제작 과정을 직접 보기도 하셨지요. 허호 선생님의 에너지가 참 좋았어요. 젖은 실로 짠 명주와 마른 실로 짠 명주, 명주를 짜고 나서 삶는 과정을 어떻게 거치는지에 따라 천의 느낌이 달라지는 걸 보면서 많은 걸 느꼈어요. 내가 쓰는 원단이 어떻게 짜여지는 건지 알게 되니 무척 재미있었죠. Q. 명주를 사용하는 게 어렵지는 않으셨어요? 천연 섬유라는 점이 가장 큰 특징이자 장점이지만, 최근 나오는 합성 섬유나 기능성 섬유에 비해 불편한 점이나 단점도 분명 있어요. 터치감도 익숙하지 않았고요. 그래서 초반에는 단점을 신경쓰다 스스로 위축되기도 했는데, 결국엔 천연 섬유의 매력을 최대한 살리는 쪽으로 마음을 굳혔죠. 그리고 디자이너로서 소재가 매우 중요하다는 사실 또한 꼭 알리고 싶었어요. 원단의 재료, 만든 이, 만들어지게 된 배경과 역사 등이 중요하다는 걸 전달하고 싶었죠. 그런데 이런 사명감이 너무 커지다 보니 프로젝트 초반에는 사람들을 설득시키려면 좀 더 화려한 기법, 수사가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했어요. 초반에는 욕심이 넘쳤던 거 같아요. Q. 명주 한 폭을 고스란히 살린 아이디어가 특히 놀라웠어요. 전통 명주는 원단 폭이 좁잖아요. 이걸로 현대 의복을 만들었을 때 버려지는 부분, 소위 ‘로스’가 너무 많은 게 고민이었어요. 그러다 로스 조각들이 너무 아까우니 한 폭을 그대로 쓰기로 했죠. 그러면 버려지는 로스가 없고, 로스가 나와도 그 조각이 네모난 모양으로 나오기 때문에 다시 활용하기가 좋아요. 한편으로 제가 디자이너 생활을 하며 알게 된 기법들 가운데 대중적이고 상업적인 기법을 명주에 접목시켜 현대적인 디자인으로 내고 싶은 마음도 있었어요. 이를 통해 생산 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명주 원단의 딜레마를 이겨내고자 했죠. 명주 원단을 많이 쓰면 생산비가 비싸지거든요. 그런데 이런 생각을 계속 하다보니 제가 생산 기법에만 치중한 느낌이 들더라고요. 어느 순간 “내가 명주에서 느낀 점이 이거 말고는 없나?” 싶은 생각이 든 거죠. Q. 방향의 전환이 이루어졌군요.명주를 처음 접했을 때의 느낌에 집중했어요. 명주 한 필이 담고 있는 소담스러운 자태와 그 자체에서 느껴지는 정성스러움이 좋았죠. 그렇게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 그 빛나는 느낌을 그대로 살리는 옷을 만들자고 방향을 바꿨고, 지금의 한 폭으로 이루어진 옷이 완성됐어요. 그렇다고 그 동안 실험했던 기법들이 전혀 쓰이지 않은 것은 아니예요. 예를 들어 패치워크나 패고딩 인터록, 천과 천을 연결하는 자수 기법을 적용하는 등 구석구석 다양한 기법들이 작은 요소로 들어가 있어요. 이번에 쓰지 않은 기법들은 다른 콜렉션에 적용해보면서 나아갈 수 있지 않을까 싶기도 하고요. 이 모든 게 전통 명주가 현대적인 디자인과 만날 수 있는 지점을 탐구해가는 과정인 거 같아요. Q. 다양한 기법들 가운데 명주와 잘 어울리는 기법은 무엇이었나요? 반대로 이질적으로 느껴진 기법은 무엇이었는지도 궁금해요.제 눈에는 현대적인 기법들이 명주와 다 어울렸어요. 명주에 어울리는 기법, 어울리지 않는 기법이 있기보다는 명주가 지닌 무궁무진한 가능성을 알게 됐달까요. 이번 콜렉션에서는 명주 자체가 주는 힘과 거기서 오는 간결함을 담백하게 보여주는 것에 초점을 맞췄어요. 버려지는 원단도 최소화하고, 좀 더 효율적인 봉재 방식을 적용하기 위해 옷을 굉장히 플랫하게 만들었고요. 대신 그 플랫한 바탕에 재봉선 몇 개로 공간감을 부여했지요. 옷의 완성은 사람이 입었을 때 그 실루엣에서 나오거든요. Q. 오유경 디자이너를 만나기 전 명주라는 원단을 어떻게 새로운 방식으로 풀어낼 수 있을지 많은 분들에게 여쭤 보러 다니기도 했어요. 그러다 오유경 디자이너를 만나게 됐는데, 이번에 함께 작업을 하면서 꽤 많이 놀랐어요. 문제를 푸는 시각과 방법이 꽤 독창적이에요. 덕분에 이 프로젝트를 1년간 해오면서 기법이나 생각을 발전시키는 과정을 지켜보는 것이 꽤 즐거웠답니다. 저도 이번 프로젝트를 통해 제작 방식에 따라 명주가 어떻게 변화할 수 있는지 감을 잡게 됐어요. 기법을 하나하나 적용할 때마다 ‘이런 느낌이 나는구나’ 하고 알아가는 과정이었죠. 레이저 커팅 같은 경우는 정말 깜짝 놀랐어요. 다만 레이저 커팅된 원단을 옷으로 상품화하기에는 착용감이 약간 불편할 수 있다는 점에서 제가 자신감이 좀 떨어졌어요. 이 기법은 나중에 조금 더 개발을 해봐도 좋을 거 같아요. 그리고 앞으로는 동대문에서 원단을 사듯이 명주도 어려워하지 않고 쉽게 살 수 있을 거 같아요. 명주는 특별히 무언가를 더하지 않아도 그 자체로 힘과 아름다움이 있어요. 옷을 만들 때 원단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고 할까요. Q. 20대에는 Mosca라는 브랜드를 만들었고, 패션 디자이너 서바이벌 TV 프로그램인 〈프로젝트 런웨이 코리아〉에 나가 탑3에 들기도 했어요. 30대가 되어 자신의 이름을 내세운 브랜드를 운영하기 시작했는데, 30대 접어들면서 옷에 대한 생각이 변한 것처럼 보이기도 해요. 20대 때는 제가 상상하는 판타지를 옷에 투영시켜 그걸 이야기로 풀어냈어요. 자아실현의 한 방법이랄까. 그런데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아 키우면서 현실적인 삶이 중요해지다보니 그 방식이 너무 불편하더라고요. 예전 옷을 안 입게 되고 손이 안 가게 되는 거예요. 허리를 꼿꼿이 세워야 맞게 되는 치마, 서 있을 때만 멋진 바지같은 것들을 과거에는 많이 만들었는데 지금은 제 자신이 그럴 수가 없거든요. 쪼그려 앉아서 아이를 봐야할 때도 있고, 허리를 많이 굽혀야 하는 게 일상이 되면서 내 옷장에 오래 살아남을 수 있는 옷을 만들어야겠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어요. 그 순간 굉장히 부끄러웠어요. 패기 어린 젊은 시절 만들었던 옷들이 부끄러워지면서 안 쳐다보게 되더라고요. 제가 20대 때는 10대에 썼던 글이나 스케치를 보지 않았어요. 너무 부끄러워서. 제가 고등학교 때는 초등학교 때 쓴 글들이 또 부끄러웠고요. 그런데 시간이 흐른 지금은 아주 어린 시절의 낙서들이 재밌고 영감도 주더라고요. 요즘은 아이디어가 떠오르지 않으면 20대 초반에 썼던 글과 스케치를 봐요. 과거의 내가 현재의 나에게 기운을 주고 영감을 주고 있는 거죠. 아직까지는 약간 부끄럽기도 하지만, 40대가 되면 어린 시절의 내가 좀 더 귀엽게 느껴 질 것 같아요. 제 안에서도 계속 순환이 일어나는거죠. Q. 앞으로 어떤 작업을 하고 싶으세요? 저는 50세가 되면 만화를 그리고 싶고, 60세가 되면 소설을 쓰고, 70세가 되면 시를 쓰고 싶어요. 나중에 화실 같은 곳에서 허리 구부리고 만화 그리고 있으면 누군가가 “대표님~ 라면 드시러 오셔요” 이렇게 말하는 풍경을 상상하곤 해요. 그렇게 만화를 그리고 소설을 쓰고 시를 쓰며 늙어 가는 게 제 꿈이지요. 등단을 위해 해마다 신춘문예 사이트를 열심히 봐요. 써 놓은 시를 올해는 보내 볼까 싶다가도 ‘아직은 아니야’ 하고요. 아직은 혼자서 그러고 있어요. Q. 창작에 대한 욕구가 굉장히 크신 것 같아요. 창작에 대한 욕구라기 보다는 머릿속에 떠오르는 그림을 그 즉시 표현하지 못할 때 느끼는 답답함이 커요. 지금도 너무 재밌는 스토리가 떠오르는데, 해야만 하는 눈앞의 일들이 너무 많아 하지 못하는 상황이 있거든요. 그럴 때는 나중에 백발이 돼서 시 한 편 멋지게 쓸 날을 상상하면서 기운을 내고 눈앞의 일을 해요. Q. 아이들을 돌보면서 일도 해내시니 대단합니다. 양가 부모님이 많이 도와주세요. 아이들이 어릴 때는 제 등에 업고서 공장에 가고 그랬어요. 그러면 공장 사장님들이 “너 지금 공임 깎아 달라고 애기 업고 오는 거냐”고들 하셨는데.(웃음) ※ 본 인터뷰는 지역으로부터 가치 있는 물건과 이야기를 전하는 ROBUTER에서 진행했습니다. 《Layered on Layers - Studio Ohyukyoung 2021 Myungju Collection》은 현재 한남동 Handle with Care에서 진행됩니다.☞ 전시 소개 자세히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