짙푸른 빛으로 물드는 여름, 수안 작가님과 서면으로 긴 대화를 주고받았습니다. ‘수안修安’이라는 이름처럼 편안하면서도 섬세한 작업을 두루 살필 수 있는 시간이었어요. 깨진 그릇을 수선하는 공예 기법인 ‘킨츠기’에 관한 이야기부터 작업의 비하인드 스토리까지 여기 함께 나누어봅니다. Q. 안녕하세요. 처음 인사드립니다. ‘킨츠기를 하는 안과 의사’라는 이력이 독특한데요. 간단하게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A. 안녕하세요. 망막 수술과 백내장 수술을 주로 하는 11년 차 안과 전문의가 본업입니다만, 최근에는 그릇을 고치는 ‘그릇 의사’를 겸하고 있습니다. 요즘 제 환자 명단에는 그릇 환자분들도 많이 올라가 있어요. 대부분 도자기 환자고, 유리 환자도 드문드문 있답니다. Q. 깨진 그릇을 수선하는 ‘킨츠기’는 국내에서는 조금 낯선 기법입니다. 어떤 계기로 시작하게 되셨나요? A. 오랫동안 도자기 그릇을 좋아했어요. 그릇은 쓰다 보면 금이 가고 깨지기 마련인데, 좋아하는 기물이 깨지면 정말 속이 상하더라고요. 그러던 중 TWL 김희선 실장님이 도자기도 고쳐 쓸 수 있다면서 일본 교토에서 킨츠기를 배워오신 수미 선생님을 소개해주셨어요. 처음에는 수리를 의뢰하려다가, 직접 고쳐봐도 재미있겠다 싶어서 본격적으로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킨츠기는 옻을 이용해 기물을 수리하는 일본의 전통 공예인데요. 일본은 상대적으로 도자기가 귀했기 때문에 깨진 그릇을 고쳐 쓰는 문화가 자연스럽게 발달했다고 해요. 반면 우리나라는 좋은 도자기를 쉽게 구할 수 있어 기물이 다쳐도 굳이 수리해서 쓰지 않았고요. 도자기 문화가 발달한 것에 비해 고쳐 쓰는 일이 낯선 것도 이렇게 보면 자연스러운 흐름이지요. Q. 수리 과정과 방법을 간단히 소개해주세요.A. 킨츠기는 크게 생옻으로 수리하는 ‘혼(本) 킨츠기’와 합성 옻을 이용하는 ‘칸이(簡易) 킨츠기’로 나눌 수 있어요. 저는 혼 킨츠기 기법으로 고치는 것을 더 선호합니다. 칸이 킨츠기보다 과정이 복잡하고 시간과 노력이 소요되지만, 천연 접착제인 생옻을 사용하기 때문에 식기를 고치는 데 더욱 안전하다고 생각합니다. 또, 생옻으로 작업하면 그릇이 지녔던 본래의 디테일을 훨씬 더 정교하게 살릴 수 있어요. 물론 칸이 킨츠기도 깔끔하고 빠르게 수리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도자기의 바탕색이 밝거나 유약이 스미는 성질을 띠면 까만 생옻을 쓰는 혼 킨츠기만으로는 깔끔하게 수리하기 어려울 때가 있는데요. 이런 경우에는 칸이 킨츠기 기법을 병행합니다. 혼 킨츠기 기법으로 깨진 기물을 수선할 때는 조각을 퍼즐처럼 맞추는 것부터 시작해요. 생옻에 밀가루를 섞어 반죽한 것을 풀처럼 발라서 조립하고, 조각이 부스러지거나 사라져서 빈 곳에 생옻과 토분을 섞어 반죽한 것을 채웁니다. 옻이 충분히 마르면 사포질해서 면을 고르게 맞추지요. 그 위에 옻을 칠하고 말리기를 3번 이상 반복하고, 마지막에 금분이나 은분 등으로 장식하면 완성됩니다. Q. 작업명인 “수안修安”에 관해 설명 부탁드립니다.A. 가장 좋아하는 한자가 “편안할 안安”이에요. 학생 시절에는 새로운 것을 찾고 도전하기 위해 늘 감각을 곤두세웠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오래된 일상이 주는 편안함이 좋다는 걸 깨달았어요. 그래서 지금은 주변 사람들에게도, 환자들에게도 편안한 사람이 되려고 노력합니다. 그런 마음은 작업에서도 마찬가지죠. 사물의 본디 모습과 속성을 되찾도록 어긋난 것을 고쳐서 바로 잡는 것(修)이 곧 편안함(安)에 이르는 길이라는 의미로 작업명을 ‘수안修安’이라 정했습니다. Q. 작업하시면서 특별히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가 있다면 들려주세요.A. 킨츠기 작업을 하다 보면 종종 옻 반죽을 좁은 틈에 밀어 넣어야 하는 경우가 있어요. 그런데 일반적인 수리 도구로는 반죽이 꼼꼼하게 밀려들어 가지 않을 때가 많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후배가 하는 치과에 치료받으러 간 적이 있는데, 그곳에 반죽을 밀어 넣을 때 쓰면 안성맞춤일 것처럼 생긴 도구가 있는 거예요. 실제로 이가 썩은 곳을 갈아낸 후에 레진이라는 충전물을 채울 때 밀어 넣는 도구였어요. 바로 후배를 통해 구매해서, 옻 반죽을 밀어 넣는 용도로 아주 요긴하게 쓰고 있습니다. 그 후 어딜 가나 새로 보이는 도구가 있으면 유심히 보는 버릇이 생겼어요. 또 기물을 수리할 때는 아주 미세한 금을 자세히 보거나 오목한 기물의 안쪽을 들여다볼 일이 많은데요. 제가 노안이 오기 시작해서 가까이서 보기 어려울 때가 있고, 기물 안쪽은 어두워서 더욱 안 보이는 거예요. 그때 저희가 수술할 때 쓰는 헤드램프를 쓰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루페(loupe)’라는 작은 확대경이 달린 헤드램프인데요. 예전 같으면 수술용 헤드램프는 엄청나게 크고 비싸서 살 엄두를 못 냈을 텐데, 요즘에는 100g 정도 되는 초경량 헤드램프를 낮은 가격에 구매할 수 있더라고요. 당장 주문해서 작업할 때 애용하고 있습니다. Q. 수선하는 이의 가치관이나 미감에 따라서도 결과물이 달라질 듯합니다. 특별히 염두에 두시는 기준이나 작업 고유의 특징이 있다면 무엇일까요.A. 킨츠기의 기본 원칙은 ‘원래 기물의 상태에 가장 가깝도록 되돌린다'입니다. 깨지고 이가 나간 면을 본래의 상태대로 잘 맞추어 복구하는 거죠. 보통은 쓰던 기물이 상해서 수리를 하게 되니 이 원칙대로 고치면 됩니다. 그런데 가마에서 소성하는 도중 터진 기물은 앞선 원칙대로 하기도 어렵고, 고쳤을 때 아름답지 않은 경우가 많아요. 센 불을 받아서 뒤틀리거나 늘어나면서 터지다 보니 면 사이가 어긋나있어서 옻 반죽을 좀 더 채워 넣어야 할 때도 있고, 터진 단면에 유약이 묻어있어 수리가 쉽지 않은 일도 있습니다. 이럴 때는 양쪽 면을 반듯하게 맞추기 위해 옻 반죽을 너무 많이 덧대면 기물 고유의 느낌을 해칠 수 있어요. 너무 많이 개입한 느낌이랄까요. 그래서 개입은 최소한으로 줄이되, 원래 기물이 가진 모양과 기능을 최대한 되살린다는 원칙으로 수리합니다. Q. 새로운 물건을 접하는 일이 어느 때보다 익숙해진 요즘, 다친 물건을 고쳐서 활기를 불어넣는 일은 더욱 특별하게 다가옵니다. 작가님에게 물건을 수리하는 일은 어떤 의미가 있나요?A. 세 가지 면에서 제게 수리는 기쁜 일인데요. 첫째는 아끼던 기물이 상해도 고쳐서 다시 쓸 수 있게 되니 그 자체로 기쁘고요. 둘째는 기물이 다칠까 봐 편하게 쓰는 것을 주저하던 마음이 사라져서 좋습니다. 이전에는 좋아하는 기물을 쓰려고 하다가도, 혹시 깨지면 어쩌나 싶은 마음에 실컷 즐겨 쓰지 못했어요. 그런데 이제는 깨져도 고칠 수 있다고 생각하니 언제든 마음 가는 대로 쓰고 있습니다. 불안한 마음이 가신 거죠. 셋째는 지구를 아끼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어 기쁩니다. 상해서 버려질 위기에 있는 그릇의 쓸모를 되찾아주는 작업이니까요. 한번은 친한 도예 작가님이 인상 깊은 말씀을 해주셨어요.“도자기 만드는 사람에게 사실 가마에서 터져 나온 그릇은 불량품인 셈이고, 작가에게 그런 작품은 흠결이라 남에게 보이고 싶지 않은 마음도 많다. 하지만 도자기는 수천 년 전에 만든 것들도 썩어서 자연으로 돌아가지 않고 땅에서 출토되고 있으니 그야말로 오천 년 쓰레기다. 완벽하게 반듯한 형태가 아니더라도, 조금 손을 봐서 쓸 수 있으면 쓰는 것이 요즘의 시대 정신에 어울리는 것이 아닐까 싶다.” 라고요. Q. 작가님의 킨츠기 작업을 선보이는 첫 전시입니다. 전시를 보러오시는 분들께 전하고 싶은 메시지가 있으실지요?A. 훌륭한 작가님들의 기물을 고칠 수 있어 영광이었습니다. 쓰임을 되찾아 다시 우리 곁으로 온 기물들을 통해, 그릇뿐만 아니라 우리 주위의 많은 사물이 수선으로 되살아날 수 있음을 생각해주셨으면, 그리하여 고치는 기쁨과 다시 쓰는 기쁨을 함께 누리시길 소망합니다. 또, 저를 킨츠기 작업의 길로 인도해주신 수미 선생님께도 감사의 인사를 전하고 싶습니다. 감사합니다. Q. 앞으로의 작업 계획이 궁금합니다.A. 그릇 고치는 일을 좋아하지만, 수선을 전문적인 업으로 삼고 있지는 않아서 전시의 수익금은 어린이 복지를 돕는 단체에 전액 기부하려고 해요. 앞으로도 고칠 기물이 주어지는 대로 부지런히 수리해보겠습니다. 《수선가경修繕佳景 - 수안 킨츠기 작품전》은 2022년 7월 24일까지 한남동 handle with care에서 진행됩니다.☞ 전시 소개 자세히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