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볕이 선명한 8월의 초입, 이정은 작가님과 서면으로 긴 대화를 주고받았습니다. 오랜 시간 촘촘히 쌓아 올린 작가의 세계를 깊숙이 들여다볼 수 있는 시간이었어요. 거리와 시차를 뛰어넘은 그간의 이야기를 여기 함께 나누어봅니다. Q. 안녕하세요. 뉴질랜드는 지금 한겨울이라고 들었어요. 최근 일과는 어떻게 보내고 계시나요? A. 네, 몇 주 전 동지를 넘기고 줄곧 비가 내리는 전형적인 겨울날을 지나고 있어요. 북반구 겨울에 맞춘 축제를 여름에 몰아 보내느라 지루하기만 했던 계절이었는데, 올해는 원주민 달력에 맞춘 새해인 ‘Matariki’를 공식적인 명절로 인정하게 되어 예년과 분위기가 많이 달라졌어요. 이곳의 기후에 맞게 추운 날을 위로하며 지내는 법을 배우고 있습니다. 계절에 반하지 않고 찬찬히 받아들인다는 것이 완전히 다른 삶에 발을 들이는 느낌이에요. Q. 한국에서 2017년까지 텍스타일 브랜드 ‘cohn. 코흔’을 운영하셨지요. 직접 원단을 지어 만든 옷과 소품, 매 시즌 선보이는 컬렉션이 인상적이었어요. 몇 해 전 삶의 터전을 옮겨 새로운 위빙 작업에 임하시게 된 계기가 궁금합니다.A. 직조는 2002년 학교에서 처음으로 접한 후 프랑스에서 돌아왔을 때 텍스타일 스튜디오를 계획하면서 본격적으로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2014년 코흔을 시작했을 때도 나염 원단 외에 ‘artisanat’이라는 라벨을 만들어 꾸준히 이어왔고, 공예적 디테일을 강조한 일곱 시즌에서 수공예는 브랜드 정체성에서 가장 큰 부분이었어요.처음 뉴질랜드로 이주한 이후로는 작업 환경이 많이 바뀌어 온전히 저 스스로 컨트롤할 수 있는 직조 작업에 더욱 집중하게 되었습니다. 감사하게도 좋은 기회들을 얻게 되어 계속 실험하면서 공부하고 있어요. Q. 원통형으로 직조된 ‘Matinee’ 시리즈가 독특하면서도 아름답습니다. 작품의 영감은 주로 어디서 얻으시나요?A. 직조는 끈기가 필요한 작업이지만 기본적으로는 씨실과 날실의 교차라는 간단한 메커니즘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 안에서 어떤 소재와 색을 어떤 패턴으로 변주하느냐에 따라 결과물이 달라집니다. 이 반복적인 작업에서 색과 연속성은 저에게 매우 중요한 주제이기 때문에 평면에 머무르기도 하지만 끝과 끝을 이어 원형으로 만드는 작업을 주로 하고 있어요. 오랜 시간 한자리에 앉아 직조를 하다 보면 계절의 흐름이 자연스레 작업에 녹아들고는 합니다. 메인 시리즈인 〈Matinee〉는 제한된 공간의 무한한 루프 속에서 한 방향으로 줄곧 흐르는 시간을 떠올리는 과정에서 만들어진 형태입니다. 덧붙이자면 ‘Matinee’는 불어로 ‘아침나절’이라는 뜻인데, 개인적으로 아침이라는 명사 ‘Matin’에 동사 어미가 붙어 마치 이른 아침이 정오를 향해 걸어가고 있다는 인상을 받습니다. Q. 불어에서 착안한 작품의 이름, 자연의 흐름을 존중하는 뉴질랜드… 서로 다른 색채를 지닌 장소에서의 삶이 작업의 정체성과도 밀접하게 이어지는 듯합니다. 각 나라에서의 생활과 이주의 경험이 작가님에게 어떤 영향을 주었을지 궁금해요. A. 대학을 다니면서 서울과 파리, 그리고 뉴질랜드에 이르기까지 제법 굵직한 장소의 변화를 여러 번 겪었어요. 사는 곳뿐만 아니라 출산하고 아이를 키우게 되면서 여성으로서의 변화도 있었습니다. 이 여정에서 자연스레 다층적인 정체성에 관한 고민이 깊어졌어요. 그중에서도 '언어'는 사고의 반영이라고 생각해서인지 가장 민감하게 받아들이는 편인데, 세 가지 언어가 하루에도 몇 번씩 뒤바뀌고는 합니다. 완전치 않은 주 언어를 가지고 생활하는 일은 끊임없는 확인과 정돈, 그리고 포기의 과정을 요구하기도 하는데요. 그런 의미에서 제게 위빙은 흩어진 정체성을 한군데로 모으는 창과도 같습니다. 명확하지 않은 말들을 하나의 조형 언어에 투영함으로써 현재 머무는 곳이 어디든 나를 그곳과 연결해주는 느낌을 받아요. Q. 신작인 〈Face〉에 관해서도 이야기 나누어보고 싶습니다. 특별히 액자 형태를 고안하신 배경이 있나요?A. 저는 평직 기술을 주로 사용합니다. 무늬직과는 다르게 베바닥이 단순하고 꺠끗해서 다른 기법으로 표현을 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Face〉도 노란 바탕 위를 가로지르는 매듭과 브레이드를 나무 액자에 평직으로 담은 작업입니다. 액자는 미술품을 보여주는 고전적인 방식이지만, 틀을 부여함으로써 작업에 새로운 정체성이 주어진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스카프를 두른 얼굴이 떠오르도록 손으로 짠 직물을 얹어 인간성을 드러낸 것도 비슷한 맥락입니다. Q. 이번 전시는 작가님이 운영하시는 ‘Shop CORRESPONDENCE’의 셀렉션을 선보이는 자리이기도 합니다. 뉴질랜드와 한국의 작업을 교류하는 만큼 ‘서신 교환’이라는 이름이 더욱 특별하게 다가오는데요. 간단히 소개 부탁드립니다.A. ‘CORRESPONDENCE’는 말 그대로 한국과 뉴질랜드 두 나라의 공예와 디자인을 교류하고 소개하는 플랫폼입니다. 이곳에서 정착하고 지내다 보니 두 나라가 서로의 아름다움에 관해 제한된 키워드를 가지고 있다는 답답함을 가지고 있던 차에 두 곳의 이야기를 교류하는 일을 제가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으로 시작하게 되었습니다.이번에는 ‘CORRESPONDENCE in Seoul’이라는 주제로 뉴질랜드의 작업물을 이곳에 보여주게 되었지만, 올해 말 오클랜드에서 우리 공예품의 미감을 소개할 계획이에요. Q. 지그시 눈을 감은 얼굴과 손을 모티프로 한 심볼, 브랜드를 설명하는 산문 등 담담하면서도 시적인 분위기의 BI가 인상적입니다. 보이는 것은 물론 무형적인 지향성도 명료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CORRESPONDENCE’가 나누고자 하는 가치나 방향이 궁금합니다.A. 처음 ‘서신 교환’이라는 뜻의 이름을 지을 때는 예술 장르로서의 코레스폰던스를 염두에 두고 과거 미술가와 시인, 작가들이 교환했던 서신에서 영감을 많이 받았습니다. 만드는 이가 중심이 되어 동시대의 이야기를 담을 수 있는 플랫폼으로 성장했으면 하는 바람으로 두 나라의 작업물 균형을 맞추며 만들어가고 있어요. ‘CORRESPONDENCE’의 시각적인 부분을 기획하고 만들어 준 편집자이자 크리에이터 Yasmine Ganley가 쓴 글에 BI를 완성해 준 김지연 시인의 산문을 첫 서신 교환의 의미를 담아 웹 사이트에 원문 그대로 실었습니다. Q. 브랜드나 작품을 선별하실 때 염두에 두시는 기준점이 있을까요?A. 제가 직접 오래 두고 사용해온 작품이나 브랜드를 선별하여 소개하고 있습니다. 20여 년 동안 먼 곳으로 여러 번 거처를 옮기면서 간직해야 할 것에 대한 나름의 기준이 생겼어요. 꺼내 쓸 때마다 만족스러운 형태, 견고히 만들어진 것, 기능을 다하더라도 자연적인 소재로 되어 있어 땅에 피해를 적게 주는 물건. 이것이 실용성이라는 가치를 향한 제 관점입니다.또한 지난 3년간 팬데믹을 겪으면서 저뿐만 아니라 많은 분이 소비와 소모에 관해 고민하게 된 것 같습니다. 이 플랫폼을 통해 또 다른 소비를 부추기고 싶은 마음은 없지만, 간소한 일상에서 심미를 추구하는 것이 가장 이상적인 생활 방식이라는 생각으로 신중히 소개하고 있어요. Q. 뉴질랜드 공예품의 특징이 있다면 무엇일까요.A. 뉴질랜드는 사람의 발길이 닿은지 비교적 얼마되지 않아 자연의 에너지가 매우 강한 땅입니다. 습도 차가 큰 기후 덕에 수종이 독특하고, 화산섬이기 때문에 흙의 성질도 다릅니다. 작업자들은 이러한 재료의 성질에 거스르지 않고 이해하며 존중한다는 인상을 받았어요. 벌목한 목재를 사용하지 않고, 태풍에 부러져 침수된 나무를 말려 작업한 그릇은 미묘한 광택과 틀어진 형태를 지니는데 저는 이것이 뉴질랜드 공예를 설명하는 좋은 예라고 생각합니다. Q. 작가님의 작품을 오랜만에 국내에서 선보이는 만큼 반가워하시는 분들이 많을 것 같아요. 관람객분들에게 전하고 싶은 메시지가 있으실까요?A. 한국에 가보지 못했던 몇 년은 지금 사는 곳에서 내린 뿌리를 좀 더 튼튼히 만들 수 있는 계기가 되기도 했습니다. 작품의 변화가 낯설게 느껴지실 수도 있지만, 작업을 통해 가지를 쳐내고 방향을 잡아가는 여정이 관람객들의 마음에 닿기를 바랍니다.무엇보다 오랜만에 돌아가는 집에서 직업인으로 사람들과 연결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신 handle with care에게 큰 감사를 전합니다. Q. 앞으로의 작업 계획이 궁금합니다.A. 지금 하는 텍스타일 작업과 프로젝트를 지속적으로 잘 일구어나갈 계획입니다. CORRESPONDENCE는 상점의 기능을 넘어 작가들에게 새로운 장을 열어주고 싶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어요. 아마 내년에 관련 전시를 준비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CORRESPONDENCE in Seoul - 이정은 작품전》은 2022년 8월 28일까지 한남동 handle with care에서 진행됩니다.☞ 전시 소개 자세히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