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새 도착한 유월, 흘러가는 봄을 갈무리하며 푸른 산세가 아름다운 포 작가님의 작업실에 방문했습니다. 북적이는 풍경에서 한 걸음 물러선 공간. 그곳에서 느슨하게 유영하는 시간을 따라 다가올 전시와 작업에 관한 이야기를 차근히 주고받아 보았어요. 사물 하나하나에 긴 호흡으로 불어넣은 애정과 손끝이 빚어낸 다감한 이야기를 이 자리에 나눕니다. Q. 작업실 근처의 풍경이 아름다워요. 이곳에서의 평소 일과는 어떻게 흘러가나요?A. 아침 대부분은 웃으며 잠에서 깨요. 따뜻한 차를 마시거나 잠시 책을 읽다가 도시락을 챙겨 작업실로 향합니다. 지하철에서 내리면 바로 북한산 인수봉이 보여요. 산책로를 지나 작업실로 가서 차 한잔 들고 스무 걸음쯤 걸어 나오면, 바로 앞에 조선시대 문헌 〈우이동구곡기(牛耳洞九曲記)〉에 나오는 아홉 번째 계곡이 있습니다. 그곳에서 투명한 물소리를 들으며 숨을 고르고, 오늘의 작업 순서를 생각해봅니다. 작업실 바로 옆에는 조선 영조 시절 홍문관 홍양호 선생이 심으셨다는 늙은 벚나무가 있어요. 차를 마시면서 늘 벚나무의 변화를 살피게 됩니다. 오전 작업을 마치고 날씨가 허락하는 날이면 헤드폰으로 음악을 들으며 계곡 가운데 바위에서 도시락을 먹어요. 숲으로 들어가 걸을 때는 청둥오리들, 쇠백로와 직박구리를 자주 만납니다. 제 옆을 무심히 지나가기도 하고, 바로 옆에서 먹이를 찾기도 하는 모습을 보면 저를 숲의 일원으로 여기는 것 같아요. 도시락을 먹고 나오는 길에서는 낙엽과 나뭇가지, 돌들을 수집합니다. 한 번도 저를 빈손으로 내보내지 않아요. 같은 길을 매일 걸어도 숲은 매번 다른 모습을 보여줍니다. 고사리와 새싹, 벚꽃 흩날리는 계곡, 비 오는 날 짙은 풀 냄새, 눈이 조용히 내리는 숲, 찬란한 단풍… 다시 오후 작업에 푹 빠져있다가 나올 때 이곳에 오면 기분이 참 좋아요. 어느새 저녁이 되고, 아쉽게 작업실을 나서면 맑고 찬 공기가 청량합니다. 늦은 밤에 집에서 차 마시며 작업 스케치하는 것을 참 좋아하는데, 이때가 되면 다시 마음이 두근거려요. 어서 작업실로 가서 만들어보고 싶은 마음에 설레는 시간입니다. Q. 《백 년의 사물》은 전시의 제목이자, 이번 작업을 아우르는 큰 주제이기도 합니다. 한 세기를 기점으로 삼았던 순간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요.A. 100년 후에 누군가 은 땅콩 케이스 안에 든 은 땅콩을 보고 미소 짓는 장면을 상상하는 것으로 저는 이 작업을 해야 할 이유가 충분하다고 생각했어요. 어릴 적 엄마가 담아놓은 내 작은 첫 이를 30년 후 귀여운 은 케이스를 열어 발견했을 때, ‘이렇게 모든 순간이 그녀에게 소중했구나’ 하는 것을 느꼈을 때, 은을 녹이고, 줄질하고, 다듬는 모든 시간이 당연했고, 당연해야만 했어요. 우리가 지나치는 정서들, 백 년 전의 그 사물들이 지금 소중히 간직되고 여러 사람의 소중한 기억을 만들어가는 것처럼 그것들이 사라지기 전에 다시 100년 후의 빈티지를 지금 만들고 싶었습니다. Q. 직접 수집한 자연물로 틀을 떠서 만드는 작업 방식이 인상적이에요. 자세한 제작 과정이 궁금합니다.A. 어느 날 문득 올린 사진 속 기물은, 사실 몇 개월에서 몇 년에 걸친 결과물이에요. 대부분 금속을 중심으로 작업하지만, 처음 형태를 잡을 때 쓰는 원형의 재료는 다양합니다. 바위에서부터 낙엽, 풀과 밀랍, 그리고 눈과 흙까지요. ‘자연물을 그대로 떠내면 되는 게 아닌가’하고 물으시는 분들도 있지만, 주조가 되게 하기 위한 전처리나 주조 후의 후처리가 각각의 기물마다 다르고, 때로는 실패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저는 작업실을 실험실이라 생각하고, 저를 ‘실험하는 사람’으로 정의하고 있어요. 기물을 상상하고, 원형을 만들기 전에는 우선 완성된 기물이 어디에 쓰일지, 또 어떤 강도여야 하는지를 가늠해 봅니다. 적절한 굳기를 지닌 금속을 정한 후, 이 금속이 주조될 수 있는 최소한의 두께와 마무리로 원형을 제작합니다. 그다음 몰드를 만들기 위한 과정은 큰 인내를 요하는 것이어서, 하나의 차시나 포크를 만들기 위해 최소 세 번 몰드를 만들게 됩니다. 한 개의 기물을 위해 많게는 몰드를 스무 번 만든 적도 있어요. 몰드를 만든 후 왁스를 사출하면, 여기서 다시 수정 작업을 하고 주조를 합니다. 주조를 위해 다음 날 녹일 금속의 무게를 잰 뒤, 그동안의 작업을 탈랍기에 넣고 나오는 날은 설렘과 불안이 가득합니다. 다음 날 아침 금속을 녹여 붓고, 식혀서 찬물에 석고를 걷어낼 때의 안도감은 거의 중독과 같아요. 작업 과정 중 가장 안정감이 찾아올 때는 나무 같은 금속 주조물에서 원형을 하나씩 커터로 잘라낼 때입니다. 그후엔 다시 세공을 시작해요. 줄질과 미세광, 다시 무광 작업과 각인까지. 어느 과정 하나도 쉽지 않고, 어느 과정 하나도 실수가 없어야 하지만 지금은 실패로부터 많은 것을 배운다는 걸 조금은 알게 된 것 같습니다. 모든 과정이 즐거움이에요. Q. 찰나의 장면을 영원한 물성으로 치환하는 것. 금속을 주재료로 택한 이유이기도 할까요?A. 금속은 깨지거나 헤지지 않아 안정감이 있는 물성이에요. 백 년, 천 년을 갈 수 있죠. 그래서 고된 작업이 끝나면 중독처럼 안도감에 빠져드는 것 같아요. 바람에 날리는 순간의 풀, 부서질 듯한 낙엽의 찰나를 초조함 없이 고요한 시선으로 바라보게 하는 것. 제가 전달하고 싶은 메시지로 좋다고 생각합니다. 기물을 대하는 사람에게는 ‘단단함’과 ‘여림’이라는 양극의 감각을 동시에 바라보게 함으로써 여린 듯 강건한 정서를 전하고 싶습니다. Q. 작업의 범주가 넓은 만큼 제작하는 과정에서 생긴 에피소드도 다양했을 것 같아요. 특별히 기억에 남는 일화가 있다면 들려주세요.A. 아침과 밤에 한 줄이라도 책을 읽고 있습니다. 어디쯤 읽었는지 대충 접어놓은 것보다 책갈피로 멈추었던 순간을 기록해두면 다시 발견했을 때 그 단정함에 마음이 놓입니다. 간간이 계곡에서 책을 읽기도 하는데, 작업실이 있는 숲을 조금 깊이 들어가면 떡갈나무와 상수리나무가 빽빽하고 그 아래 도토리 품은 가지들이 보물처럼 떨어져 있는 풍경이 보여요. 이번에 만든 도토리 책갈피는 그때 책에 꽂아두었던 귀여운 떡갈나무 잎으로 만들었습니다. 도톰한 무게감의 도토리가 이리저리 구르는 모습도 즐거운 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또 작업실 옆집에는 큰 목련 나무가 있습니다. 열흘 남짓 피는 목련이 벅차게 아름다워서, 겨울 끝자락부터는 조용히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리곤 합니다. 목련에 무심했던 몇 년 전 어느 날에는 꽃잎 하나가 발등에 내려앉았어요. 그 꽃잎을 손에 들고 올려다본, 하늘을 가득 채운 커다란 목련 나무의 모습을 아직도 잊지 못합니다. 올해도 전시를 준비하는 봄에 목련 꽃잎이 날렸어요. 보드랍고 도톰한 그 느낌을 곁에 두고 싶어서 새롭게 작업했습니다. 다행히 결과물이 잘 나와서 이번 전시에 소개하게 되어 기쁩니다. Q. 표면을 들여다보면 작품마다 나란히 새긴 각인이 있어요. 이 중에서도 잉어 모양의 각인이 독특한데.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나요?A. 8년 전 미국의 한 서점에서 은과 주석의 시대별, 지역별 각인을 정리해둔 책을 발견했어요. 그때는 빈티지 수집에 더욱 몰입했던 때라 속으로 ‘유레카!’를 외쳤습니다. 이렇게 작업에 각인을 해두면 또 재미있는 일들이 생기겠다 싶었지요. 저는 대학 때부터 물고기에 관한 상징적인 느낌을 가지고 있어요. 물고기의 심상이 머릿속에서 헤엄치다가 가끔 개구지게 뛰어올라 영감을 주기도 하고요. 졸업을 앞두고 야외 조각전에서 투명한 물고기를 15층 창밖에 설치하는 작업을 하기도 했어요. 그러다 우연히 박물관에서 잉어 연적을 발견했는데, 뛰어올라 신나게 꼬리를 들어 올린 모습이 제 머릿속 귀여운 물고기와도 닮았더라고요. 발음도 ‘잉어’라니. 얼마나 재기발랄한지요. 만들고자 하는 것을 만들겠다 다짐하며 사는 제게는, 이 물고기가 영감의 원천이자 자유로움의 상징이에요. 그리고 각인 중에서는 또 하나의 잉어가 있습니다. 잉어 자물쇠를 형상화한 포의 각인이에요. 잉어는 한번 물면 놓지 않고 밤에도 눈을 뜨고 지킨다고 해서 ‘소중한 가치를 지키고 축적한다’는 의미로 귀한 물건을 담는 곳에 자물쇠로 쓰였다고 합니다. 제 기물들이 쓰임을 받아 귀한 가치를 쌓아나가길 바라는 마음으로 새겨넣었어요. Q. 이번 전시는 작가님이 여러 대륙에 걸쳐 수집해온 물건을 소개하는 자리이기도 합니다. 마음을 이끄는 것, 오래도록 소유하게 되는 물건에 관한 작가님만의 기준이 있다면 무엇일까요.A. 첫 번째는 아날로그의 정서입니다. 나와 천천히 교감하는 정서가 담긴 사물들이 있습니다. 편지의 무게를 재는 저울의 움직임, 달력을 넘기는 동안 손의 기억과 하루를 향한 기대, 잠시 멈춰 바람이 불고 풍경이 흔들리는 일을 지켜보는 일 같은… 살면서 어느 하루, 어느 순간을 기분 좋게 기억할 수 있게 만드는 사물을 좋아합니다. 두 번째는 시간이에요. 작업자로서 결코 담을 수 없는 것은 시간입니다. 시대를 있는 그대로 통과하면서 시간이 깊게 녹아든 빈티지의 표면을 보고 있으면, 영리하지도 빠르지도 않게 찬찬히 세상에 섞여보자고. 그렇게 정공법으로, 온몸으로 시간을 통과하면서 좋은 생각이 밴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이 듭니다. 마지막으로는 소장 가치예요. 매력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형태나 물성이 주는 표면, 색감만으로도 거부할 수 없는 매력을 지닌 사물이 있어요. Q. 포包°의 작품을 새롭게 만나는 분들에게 전하고 싶은 메시지가 있다면 말씀 부탁드립니다.A. 우리는 참 많은 사람과 넘치는 물건들 속에서 삽니다. 그러나 한 사람, 그리고 애정이 깃든 몇 개의 사물은 귀하고 소중하죠. 곁에 있다면, 지금 손으로 쓰다듬어 본다면 서로에게 스미는 그 시간이 1초 전과는 조금 다른 삶을 살게 만드는 것 같습니다. 조금 더 안정되고, 더 강인하고, 더 서로답게요. 저를 비롯한 어떤 이들은 백 개를 만들 수 있는 시간에 이런 한 개의 사물을 만들기 위해 애쓰고 있습니다. 용도까지도 중요하지 않아요. 바라보는 순간에 모두 느껴지는 것이라 믿습니다. 《백 년의 사물 - 포包° 작품전》은 2023년 6월 25일까지 한남동 handle with care에서 진행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