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友緣의 벽


나무를 재료 삼아 부드러운 형상을 조각해온 이수빈 작가의 작품전 《우연友緣의 벽》을 소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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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꿈을 꾸는 듯 평화로운 표정의 동물들, 벽을 오가는 사뿐한 걸음걸이, 온기가 느껴지는 손… 이수빈 작가는 마음을 유순하게 만들어주는 모양을 조각하며 시간의 보폭에 맞추어 묵묵히 변화를 받아들이는 수목의 생애에 주목합니다. 이번 전시에서는 부패한 표면이 자연스러운 무늬로 남은 스팔티드Spalted 목재 등 나무 고유의 물성을 살린 월 행잉 시리즈 〈벽으로 드나드는 동물들〉과 함께 가까이 두고 쓸 수 있는 일용품을 선보입니다.

이수빈

나무를 깎아 온화하고 부드러운 조각을 만듭니다. 문장을 다듬어 이야기 짓는 게 좋아 에디터로 일했고, 모호한 덩어리를 깎아 의미를 맺어주는 게 좋아 나무 깎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현재 〈Soft Shape〉라는 이름으로 동물을 모티브로 한 월 행잉 작품과 서가 용품, 오브제 등을 제작하고 있습니다.

Q. 동물 오브제 시리즈는 프랑스 작가 마르셀 에메의 소설 <벽으로 드나드는 남자>에서 출발하셨지요. ‘벽’이라는 모티브가 따뜻한 심상의 동물과 이어지게 된 배경을 알고 싶습니다.

A. 소설은 어떤 남자가 자신에게 벽을 드나드는 능력이 있음을 알게 되고 그 능력 때문에 겪는 일들을 그리고 있는데요, 그 소설이 왜 인상 깊었던 걸까 생각해보니 벽을 드나드는 능력 때문이더라고요. 벽은, 그 단어만 들어도 마치 눈앞이 턱 막힌 것만 같은데 그걸 뛰어넘는 것도 아니고 스며들어 드나들 수 있다니요! 종종 외로움을 넘어 고독할 때, 벽에 갇힌 듯한 느낌이 들 때 가만히 곁에 있어 주는 친구를 생각하며 벽을 드나드는 동물들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무해하고 무구한 동물과 함께 있다면 안전하지 않을까, 포근하지 않을까, 평온하지 않을까 하고요.


Q. 전반적인 작업 과정을 들려주세요.

A. 작업 과정을 단순하게 나눠보면, 스케치한 뒤 외형을 재단하고, 끌과 망치로 쳐서 형태를 잡아가고 조각도로 세밀하게 깎아나가는 단계를 거쳐요. 그중 물리적인 시간을 가장 많이 쓰는 건 역시 깎는 단계이고(!), 가장 즐거울 때는 구상과 스케치 단계, 그리고 가장 마음을 많이 쓰는 건 동물의 표정을 새길 때입니다. 표정을 새길 때는 한 가지 표정으로 단정되지 않았으면 하는 생각에 오래 고심하게 돼요. 절에 가면 불상을 유심히 보는 편인데, 부처의 얼굴은 완전히 미소 짓지 않으면서도 깊은 생각에 잠긴 듯해요. 그래서 보는 사람의 마음에 따라 여러 방향으로 읽히는 것 같아요. 저 역시 동물들이 평안한 상태였으면 하지만 그렇다고 확실하게 웃고 있거나 안도한 표정으로 새기지는 않으려고 해요. 보는 사람의 마음에 따라, 혹은 그 사람의 바람에 따라 읽을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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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나무를 고르실 때 바닷가에서 직접 유목을 찾아 작업하신다고도 들었어요. 재료를 선택하시는 특별한 기준이 있나요?

A. 처음에는 목재상에 가서 잘 건조되고 재단된 제재목을 구해 썼어요. 이건 나무 작업하는 사람들이 가장 쉽게 목재를 구하는 방법이기도 해요. 한데 점차 나무를 단순한 소재로 대하기보다 나무의 생을 아우르는 작업을 해보고 싶다는 욕심이 생겼습니다. 길쭉한 네모 판재로 정돈된 재료로서 나무를 접하기보다 이 나무가 어떻게 내게 왔는지, 그에 앞서 어떻게 살았는지를 생각하며 작업하고 싶었어요. 말씀하신 유목 역시 그러한 의미에서 물에 떠내려와 바닷가에 방치된 폐목재인 유목을 주워 조각으로 만들었던 것이고요. 이번 전시 때 선보이는 작품에는 특히 스팔티드 목재를 많이 사용했습니다. 이는 나무의 성장 과정이나 벌목 후에 특정 균이 침투해 나무의 물성이 변화하는 스팔팅(spalting) 현상을 겪은 것인데요. 특유의 무늬가 매력적이지만 물성 변화로 인해 어떤 부분은 바스러지기도 하고, 어떤 부분은 결이 지나치게 복잡해서 작업하기 까다로운 상태가 됩니다. 하지만 이러한 점이 오히려 매력적으로 느껴졌어요. 스팔팅 현상, 옹이나 크랙도 나무 삶의 일부라고 생각해 그 자체의 아름다움을 보여주고자 했어요. 앞으로도 나무의 삶을 아우르고 고유의 물성을 드러내는 식으로 더 많은 작업을 해보고 싶습니다.


Q. 동물 문구도 탄성이 나올 만큼 귀여운데요. 시리즈를 간단히 소개해주실 수 있나요?

A. ‘동물 문구 시리즈’는 목조각을 배우던 초창기에 구상한 것을 점차 종류를 늘려 시리즈로 구축한 것인데요. 평소 문구류나 서가 용품에 관심이 많아 내 손으로 내가 쓸 무언가를 만들어보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책상 위에 두고 늘 볼 수 있는 작은 조각상이지만 문구이기도 하면 어떨까 싶었고, 동물 조각에 기능을 접목해보기로 했습니다. 무게추를 삽입한 문진, 황동 연필깎이 부속을 삽입한 연필깎이 등이 있는데요, 특히 연필깎이는 ‘입에, 코에, 엉덩이에 연필을 꽂아 깎으면 어떨까?’ 하는 약간은 발칙한 상상으로 신체 부위의 특징을 이용해 만들어보았습니다. 특히 꼬리 부분에 연필을 꽂아 깎으면 엉덩이로 연필 톱밥이 배출되는 ‘당나귀 연필깎이’와 ‘고양이 연필깎이’를 많이 좋아해 주시는 것 같아요. 이 시리즈는 앞으로도 매년 새로운 에디션의 동물과 문구를 추가해 나가려 합니다.

작가는 벽으로 살며시 들어온 동물 조각 위에 미소를 새기며 고독한 기분이 들 때 마음속 빗장을 열고 곁을 지켜주는 존재를 생각했습니다. 오랜 시간 각자의 옹이와 흔적을 안고 새로운 얼굴로 태어나기까지, 수많은 우연이 만든 아름다운 우연友緣의 벽에 가만 기대어 보세요. 한 해를 시작하며 잠시 숨을 고르고 따뜻한 미소와 위안을 주고받는 자리가 되기를 기대합니다.

2023년 1월 10일 - 2023년 1월 29일

Tue - Sun, 12 - 7 PM (Monday Closed)  

서울시 용산구 대사관로 43 1층 Handle with Care

02-797-0151

전시 기획: Handle with Care

포스터와 리플렛 디자인: 이재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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