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요의 형태
남미혜 작품전
핸들위드케어를 밝힐 월광문반의 가득한 빛을 고대하며, 오는 11월 28일 남미혜 작품전 《고요의 형태》를 엽니다.
월광문반의 시작은 어느 겨울 양양 낙산사에서 마주한 담장의 풍경에서 비롯합니다. 기왓장을 눕혀 흙과 번갈아 쌓은 담장과, 그 사이마다 박힌 작고 둥근 흰 돌의 풍경은 작가에게 위안을 전하는 고요의 형태로 다가왔습니다. 그날의 정경은 마음 깊은 자리에 오래도록 남아 나무 반 위 자개로 달빛을 새기는 작업으로 이어졌고, 그렇게 위안을 전하는 존재로서의 월광문반이 탄생했습니다.
이제 작가는 그 위안의 감각을 달을 넘어 새로운 형태로 넓혀가고자 합니다. 어린 시절 마음이 시끄러울 때마다 찾던 성당, 그리고 성당의 창문으로 들어오던 부드러운 빛 역시 오랜 시간 자신의 마음을 붙들어준 장면이었음을 다시금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긴 시간 동안 소중히 모아온 형형색색의 창문과 잔잔한 산들바람, 수평선의 형상들은 이번 전시에서 월광문반의 새로운 문양으로 새겨져 우리 곁에 놓입니다. 더불어 기존보다 작은 크기의 월광문반도 처음으로 함께 선보입니다.
남미혜
국민대학교에서 공간디자인을 전공하고 일본 무사시노미술대학에서 석사와 박사 과정을 마친 뒤, 장식과 문양, 서로 다른 문화가 맞부딪히며 나타나는 조형적 변화를 연구해 조형예술학 박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현재 일본과 한국을 오가며 연구자, 기획자, 디자이너, 제작자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애착과 소중함 같은 감정을 다룰 수 있다면 분야에 구애받지 않고 작업의 폭을 넓혀가고자 합니다.
Q. 전시 제목인 《고요의 형태》는 작업에서 위안의 존재로 사용해 오던 ‘달’의 이미지를 출발점으로, 그 위안의 감각을 달 너머의 다른 형태로 확장해 보고자 하는 의미에서 비롯되었어요. 이번 전시를 통해 전하고 싶었던 이야기에 대해 자세히 말씀 나눠 주세요.
A. 월광문반이라는 작업 덕분에 오랜 시간 가지고 살던 통제 강박을 많이 고쳤습니다. 계획대로 되는 게 하나도 없거든요. 어렵게 완성한 작업이 예상한 것 이상으로 많은 분들께 사랑받게 되면서 내가 세운 가설이 틀리지 않았다는 생각에 기쁘면서도 한동안 혼란스러운 시기를 보냈습니다. 지금도 작가라는 호칭이 어색 한데, 당시에는 “저 작가 아닌데요?” 하고 부정할 정도였어요.
여러모로 준비가 되기도 전에 주문이 밀려 들기 시작해, 계획했던 일을 모두 접어두고 일단 밤을 새워 완성해야 했습니다. 그러던 중에 일종의 번아웃이 왔던 것 같아요. 같은 일을 반복하는 데서 오는 불안도 있었고요. 연구자로서 하나의 결론을 내렸으니 어서 다음 주제로 옮겨가야 하는데, ‘나 지금 뭐 하고 있는 거지?’ 하는 생각에 피로가 쌓여가던 때였습니다.
그럴 무렵 프로덕트 디자이너 후카사와 나오토 Naoto Fukasawa 선생님을 서울에서 만났어요. 근황을 이야기하다가 요즘 이런 걸 만들고 있다고 월광문반을 선물로 드렸는데, 손에 들고 가만히 바라보시더니 “그렇지, 오래전부터 사람들에게 달은 평면이었지.” 하고 나지막이 말씀하시는 거예요. 순간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었어요. 어떤 마음으로, 왜 이 작업을 시작했는지를 힘들다는 이유로 감쪽같이 잊고 있었다는 걸 깨달은 거죠.
달은 오랫동안 ‘바라보는’ 대상이 되어 왔습니다. 긴 세월을 거쳐 수많은 사람들을 안심시키고, 소원을 들어주고, 어두운 밤길을 안내해 주는, 무엇보다 듬직한 존재였어요. 늘 약속한 시각에 하늘 위로 떠오르고 모양을 바꿔가며 시기를 알려주기도 하고요. 지구 주위를 도는 위성이기 전에 늘 같은 자리에서 우리를 지켜봐 주는 동그랗고 밝게 빛나는 평면. 그런 존재의 이름을 감히 빌려와 놓고는 힘들다고 징징대기만 했던 게 어찌나 부끄럽던지. 그날을 계기로 작업에 대한 마음가짐은 물론이고 많은 것이 달라졌습니다. 주문을 따로 받지 않기로 하고 속도도, 수량도 최소한으로 줄였어요.
손으로는 정말 많은 것이 전달돼요. 손으로 하나하나 만드는 사람이 행복해야 완성된 물건도 비로소 사랑받을 수 있다는 걸 알게 됐어요. 그런데 같은 것을 반복해서 만드는 것에서 오는 불안은 잘 해결되지 않더군요. 그때 고요함에서 출발한 문양, ‘월광문’의 의미를 확장하는 것으로 스스로 만든 벽을 깰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Q. 이번 작업에서는 ‘성당의 창문’이 달과 같은 의미를 담은 중요한 모티프로 등장합니다. 성당의 창문을 월광문반에 새기고자 했던 이유가 무엇인가요? 또한 성당과 관련한 기억 중 특히 선명하게 남아 있는 장면이 있다면 함께 들려주세요.
A. 이번 전시를 준비하면서 달이 가진 여러 가지 의미 중에서도 ‘바라보는’ 대상, 늘 곁에서 ‘위안을 주는’ 존재를 중요한 주제로 삼고 스스로에게 계속해서 되물었어요. 나의 믿는 구석은 무엇일까. 무엇이 나를 평온하게 할까, 고요하게 할까.
어린 시절부터 사람이 많은 곳을 그리 좋아하지 않았어요. 그때도 지금만큼이나 예민했던 것 같아요. 주변이 소란스럽거나 고민이 생겨 마음속이 시끄러울 때면 도망치듯이 성당을 찾아갔어요. 두꺼운 벽으로 둘러싸인, 아무도 없는 성당 구석에 앉아 스테인드글라스 너머로 들어오는 색색의 빛을 보고 있으면 ‘안전하다’라는 느낌을 받습니다. 지금도 어느 동네에 가든지 근처 성당부터 찾아둬요. 미사가 없는 시간에 한참이고 앉아서 이런저런 생각을 정리하기도 하고, 사진이나 스케치로 그날의 창문을 수집합니다. 건축을 향한 호기심도 커요. 1960-70년대에 지어진 오래된 성당을 주로 찾아가는데 데이터가 쌓이다 보니 이제는 구조적 특징이나 디테일을 보면 누가 설계했는지 대충 알아볼 수 있게 됐어요. 어디를 가나 재개발이다 뭐다로 부수고 뒤집어엎기 바쁜 와중에 가만히 같은 자리를 지키고 있는 건물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큰 위로가 되죠.
꼭 성당일 필요는 없어요. 스스로 안전하다고 느끼는 공간 한쪽에 앉아 있다고 상상해 보세요. 풀숲에 바늘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릴 만큼 주위는 고요해요. 눈앞에 창문이 있고, 그 창문의 크기만큼의 빛이 가만히 나를 비추고 있어요. 그 순간 느끼는 감정을 그대로 작업에 옮겨 담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남미혜 작가의 깊은 애정을 담아 완성된 고요의 형태들. 전시장에 차곡차곡 놓일 작은 고요들이 각자의 자리에서 조용한 위안이 되어주길 바랍니다.
2025년 11월 28일 - 12월 14일
Tue - Sun, 12 - 7 PM (Monday Closed)
서울시 용산구 녹사평대로 40나길 34, 4층
070-4900-0104
전시 기획: Handle with Care
전시 그래픽: 이재민
식물 연출: Botalabo 정희연